글쓰는 사람들(35) 엄마의 보석함

문학의 향기


 

글쓰는 사람들(35) 엄마의 보석함

일요시사 0 1990

글_메이

<사진: 김인식> 

 

 보석함을 열면 몇 안 되는 것 중에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게 있다. 초록색 비취 주위를 큐빅으로 둘러싼 반지다. 20년 전쯤, 아껴 모은 돈으로 엄마 생신 때 선물한 것이다. 초록색 비취는 무병장수와 평화로운 죽음을 의미한다는 보석상 주인의 말을 듣고 샀던 기억이 있다.

 엄마는 모임에 가시거나 특별한 외출이 있는 날이면 종종 그 반지를 끼셨다. 엄마는 유독 보석을 좋아하셨다. 그중 반지 사랑이 유별나셨다. 반지 낀 손을 높이 올리고 미소를 짓던 엄마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난 자라면서 엄마의 구두를 신어보는 대신 엄마의 목걸이와 반지를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엄마의 보석함은 신기한 보물상자 같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하고 있으면 나도 어른이 된듯했다.

 엄마는 나를 위해 반지계를 하셨다. 한때 방송 일을 했던 내가 텔레비전 화면에 마이크를 든 손이 허전하면 안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엄마 덕에 나도 반짝이는 반지가 몇 개 있다. 어느덧 엄마 나이인 중년이 돼버린 지금 나 또한 보석이 좋다. 보석상을 지날 때면 나도 모르게 기웃거리게 된다. 하지만 마음으로만 담아둔 보석이 보석함 한 가득하다.

 

 엄마는 손녀가 보고 싶다며 딸이 사는 오클랜드를 방문하셨다. 한 달 동안 계시면서 엄마들이 그렇듯 손녀를 돌보는 일 외에 잠시도 쉬지 않고 집안 곳곳을 빛내주셨다. 한국으로 돌아가시기 얼마 전, 시내에 나가 엄마가 좋아할 만한 반지를 하나 샀다. 세일 기간이라 그런지 가격도 마음에 들었다.

 “형편도 넉넉지 않을 텐데 뭘 이런 걸 다 사고 그러니?”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반지를 받아 든 엄마의 표정은 싫지만은 않은 듯했다. 반지 낀 손을 어릴 적 봐왔던 것처럼 높이 들어 이리저리 살피시는걸 보면 말이다. 며칠 뒤, 엄마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신다.

 “네가 선물한 반지, 이미테이션이니?”

 금색으로 반짝이던 반지가 까만 구리반지로 변해 있었다. 보석상을 다시 찾아 따져 물었다. 그때 알았다. 9k 금은 향수가 묻으면 색깔이 변한다는 것을. 한국에서 18k 금은 있어도 9k 금은 본 적이 없기에 금이 맞냐고만 묻고 산 내 불찰이었다. 한국보다 가격이 싸다며 내심 기뻐했는데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보다. 광택제를 사서 다시 반짝이는 반지를 만들어 건네드렸다.

 “엄마, 이 반지 진짜 금 맞아요. 금이 많이 들어있지 않은 9k금이라 향수에 민감해서 색상이 변했다네요. 앞으로는 조심해서 끼세요.”

 무심한 듯 말씀드리며 난 속으로 되뇌었다.

 ‘엄마, 죄송해요. 다음엔 엄마가 좋아하는 큐빅이 많이 들어가고 색상이 변하지 않는 반지로 사드릴게요.’

 하지만 그 반지는 내가 엄마에게 해드린 마지막 반지가 되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다 엄마의 보석함을 열었다. 오래전부터 봐왔던 보석은 없고 내가 선물한 반지 몇 개 뿐이었다. 더는 신기했던 보물상자가 아니었다. 병색이 짙어 야위어 갔던 엄마는 돌아가시기 얼마 전, 몸무게가 많이 줄어 손가락에서 놀던 반지를 빼서 내 손가락에 끼워 주셨다. 그때의 반지와 내가 선물해드렸던 반지가 보석함의 전부라니 엄마답지 않았다. 그 많던 목걸이와 팔찌 그리고 반지는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 장례식을 찾은 엄마 지인을 통해서다. 엄마는 친한 친구를 위해 보증을 서다 그 친구가 갚을 능력이 되지 않자 엄마가 가지고 계시던 귀금속을 처분해서 해결하셨단다. 그때 엄마는 분명히 보석함을 열고 한참을 고민하셨을 것이다. 딸이 선물한 것까지 포함해서 정리를 해야 하나 하고 말이다. 하지만 내가 선물한 반지만큼은 손을 대지 않으셨다. 차마 딸에게 선물로 받은 것은 처분할 수가 없으셨나 보다.

 비슷한 경험이 한 번 더 있었다. 엄마 손에 늘 차고 다니던 팔찌와 반지는 물론이고 보석함의 귀금속들이 어느 날 모두 사라졌다. 어린 마음에 엄마에게 물었다. 늘 같은 걸 하고 다녀 싫증이 나서 모양을 달리하기 위해 보석상에 다 보냈다는 것이다. 그때는 그렇게 믿었다. 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니 그 당시 살림이 어려워 내다 파신 것이었다.

 이렇게 여자에게 보석이란 급할 때 융통할 수 있는 보험 같은 것인가 보다. 나 또한 그랬다. 1998년 한국의 경제 위기가 한창일 때다. 사람들은 소비를 최소한 줄였다. 먹는 것보다는 입는 걸 줄이다 보니 당시 의류공장을 경영했던 나는 납품업체를 하나둘씩 잃어갔다. 직원들 월급날은 다가오고 회사의 은행 잔액은 바닥이었다. 더는 은행 융자도 되지 않았다. 특별한 조치가 필요했다. 가지고 있던 귀금속을 처분해서 직원들 월급을 해결했다.

 

 딸아이 생일이라 오래간만에 한껏 멋을 내고 집을 나섰다. 음식점에서 딸아이가 묻는다.

 “엄마, 반지가 너무 예뻐요. 못 보던 반지인데.”

 “할머니 반지야. 엄마가 일하면서 모은 돈으로 사드린 거지.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엄마에게로 돌아온 거야. 너희들도 나중에 직장생활 하면 엄마처럼 돈을 모아 이렇게 예쁜 반지 많이 사줘. 엄마가 떠나면 다 너희들 것이 되잖아. 잠시 엄마가 보관하고 있는 셈이야. 밑지는 장사는 아니잖니?”

 나도 어느새 손을 높이 들고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미소 짓고 있다. 엄마처럼.

  

‘글쓰는 사람들’은 오클랜드를 중심으로 한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한 달에 두 번 모여 좋은 글을 나누며 글쓰기도 하고 있습니다. 네 명이 번갈아 가며 연재합니다.


[이 게시물은 일요시사님에 의해 2018-12-05 21:45:49 교민뉴스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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