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는 사람들(12)] “당신 암이오”

문학의 향기


 

[글쓰는 사람들(12)] “당신 암이오”

일요시사 0 2850

  행운의 무지개 - 마운트 빅토리아에서 찍다.<사진: 김인식> 

 

 2006년 5월 노스쇼어 병원 앞의 스페셜리스트 클리닉에서 외과 전문의를 만났다. 대장내시경 검사 결과와 폴립(Polyp, 용종)에서 채취한 생체검사(biopsy) 소견을 받은 그가 촉진 후에 한 말.

“당신 암이오.”

예상은 했지만 권위 있는 전문의로부터 암 선고를 받으니 청천벽력이다. 그래도 14년이란 긴 시간 동안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서 덤덤하게 물어볼 수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내가 수술해 드릴 수도 있지만 호주에서 2주간 학회가 있어서 기다려야 해요. 다른 의사를 추천해 드릴게요.”

올 것이 왔다. 대장암이란다. 그것도 말기에 가까운 3기 후반이라 심각한 상태라고 한다. 암세포가 대장을 떠나 이미 온몸으로 퍼졌고, 다행히 아직 다른 장기에는 전이되지는 않았다.

 

이민 오기 1년 전에 서울에서 한 선배가 위장병으로 입원해서 병문안을 갔다. 영업직이라 업무상 술자리를 많이 했지만 별 탈 없이 40대 중반까지 잘 지내다 갑자기 입원했는데 위암이라고 했다. 그 선배가 내게 “시간을 내 위내시경을 한번 꼭 해봐라”고 부탁했다. 병원에서 검사를 한 결과 이상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선배는 수술을 받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가까이 지내던 선배가 아직 젊은 나이에 저세상으로 가버리니 허무했다. 가끔 만나 막걸리를 마시며 이야기를 주고받던 사이였다. 누워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목 주위를 만지다가 빗장뼈 옆에 땅콩보다 조금 더 큰 딱딱한 몽우리가 느껴졌다. 이게 뭐야? 혹시라도 악성 종양? 이날부터 건강에 빨간 불이 켜졌다.

회사 일로 잘 알고 지내던 대학병원의 내과 전문의에게 혹이 발견되었다고 하니 입원해서 종합검진을 받아 보라고 한다. 난생처음 병원에 입원했다. 가족력도 없었다. 혈액검사, X선, 위와 대장 내시경을 비롯한 여러 검사 그리고 수술실에 들어가 빗장뼈 옆 혹의 생체검사까지 받았다.

열흘 동안 검사해 발견한 건 엉뚱하게도 대장 안에 수많은 용종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대로 두면 곧 폴립이 암으로 발전해서 5년 이내에 사망할 확률이 99%라고 한다. 게다가 나 같은 증상은 일반적으로 20대에 발병해서 30대에 사망할 수도 있는데 40대 초반까지 살아 있는 것만 해도 운이 좋았단다. 미리 대장을 전부 절제해서 암이 발생할 여지를 두지 말라는 권고다.

다만 나와 같은 증상이라도 확률은 아주 낮지만 발톱이 갈라지는 현상이 나타나는 사람은 암으로 가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다. 전문의의 진단이니 믿어야 하는데, 이제 막 40대 초반에 대장을 전부 자르라고? 딸 둘이 겨우 중학교 2학년과 초등학교 4학년인데. 혹시 잘못되면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되지?

열흘 간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퇴원하는데 내 처지가 너무 허망했다. 지금 할 수 있는 게 뭐지? 짐을 싸다 몇 개비 피다만 담배 두 박스가 보였다. ‘이참에 담배나 끊자.’ 24년간 피우던 담배를 끊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암이라는 상황에는 별 것 아니다 싶었다. 쓰레기통에 담배를 모두 버리고 지금까지 26년간 한 개비도 피우지 않은 것은 두고두고 잘 했다 생각이 들었다.

수술 결정을 못 내리고 일상으로 돌아가 일하면서도 머릿속에는 복잡한 생각이 뱅뱅 돈다. ‘수술 안 하면 5년 안에 죽을까? 기적이라는 것이 있지 않을까?’

입원을 권했던 내과 전문의가 재차 말한다.

“하루빨리 수술을 받게. 공해 없는 물을 마시고, 공해 없는 공기를 마시고, 공해 없는 음식을 먹으면 모를까, 현대 사회에 공해가 많으니 암으로 가는 건 시간 문제일세. 하루라도 빨리 수술해서 암에 걸리지 말고 목숨을 건지게.”

날 위해서 해 주는 고마운 말이지만 계속 ‘혹시’ 또는 ‘그래도?’가 생각난다. 인터넷을 뒤졌다. 생각보다 쉽게 한국, 미국 그리고 일본의 비슷한 병에 관한 자료를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그중에 좀 희망적인 몇 편을 골라 열심히 번역해서 공부했는데 많은 부분이 의사가 해 준 내용과 일치했다.

스스로 결론을 냈다. 괜히 고생하지 말고 믿자. 그래도 병원 의사가 이야기 한 발톱이 갈라지는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에는 암으로 가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예는 드물지만’에 마음이 가면서 계속 발톱을 살핀다.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격이다. 갈라지지 않은 발톱이 몇 주 내에 갈라질 리가 없는데 말이다.

하루는 ‘그냥 살자. 다음 날은 ‘수술할까?’ 고민을 거듭하다가 직장 동료가 아는 외국인 회사에 근무하는 독일인 중역이 대장 절제술을 받았다는 말을 해줘서 가까이 가서 수술받은 모습이 어떤지도 보고 왔다. 겉으로 봤을 때 그런 수술을 받지 않은 사람과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리고 함께 근무하고 있는 사람의 말도 그 사람이 일부러 내가 이런 수술을 받았노라 하고 말하지 않으면 옆에 있는 동료는 눈치챌 일이 없다는 말에 안심이 되었다. 수술을 받아도 정상인과 크게 다른 취급을 받지 않는 것만 해도 마음이 놓인다.

 

노스쇼어 병원에서 대장암 3기 후반이라는 진단을 내리고서 나를 진찰한 외과 전문의는 다른 의사를 추천해주려 한다. 순간 다른 의사를 또 만나느니 지금 의사에게 맡기자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릴 테니 학회에 다녀와서 수술해 달라고 부탁했다. 암 환자에게 하루가 급하다는데 최소한 3주를 기다리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직감이라고 하나? 늦추는 것이 치명적일 수도 있을 텐데 왠지 의사가 믿음직스러웠다.

의사는 2주 후에 돌아왔고 수술 날짜가 그로부터 다시 2주 후로 잡혔다. 약간 늦어지긴 했어도 모든 게 순서대로 진행되는 듯싶었다. 그런데 수술예정일 바로 전날 뉴질랜드 초유의 수련의 총파업이 시작되고 전국적으로 응급을 제외한 모든 수술은 중단이 되었다. 주위 친지 분들은 그만 기다리고 한국에 있는 병원에 아는 사람이 많을 테니 빨리 예약해서 수술을 받고 오라고 한다. 대장암 전문 병원도 있고 시설과 경험, 기술 면에서 월등히 좋다고 했다.

파업 일주일 되던 날 버켄해드에서 오네와 로드를 타고 빗길을 운전해 내려가는데 갑자기 무지개가 바로 앞 노스코트 칼리지 위로 떠 올랐다. 내 생애 그렇게 진하고 굵은 무지개를 본 적이 없었다. 무지개는 행운을 의미한다는데 저렇게 진한 무지개가 뜨는 걸 보면 저 높은데 계신 분이 내게 행운을 가져다주실 모양이다. ‘아, 곧 수술을 받을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걸 하나님께 맡기자. 갑자기 내 몸이 가벼워지며 공중으로 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다음 날로 파업이 끝나고 결국 두 달 만에 수술을 받았다. 무지개를 생각하며 수술실로 향했다.

글_김인식 

 

‘글쓰는 사람들’은 오클랜드를 중심으로 한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한 달에 두 번 모여 좋은 글을 나누며 글쓰기도 하고 있습니다. 네 명이 번갈아 가며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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