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는 사람들(20) 삶의 시간을 따라서

문학의 향기


 

글쓰는 사람들(20) 삶의 시간을 따라서 <김인식>

일요시사 0 2856

 

<사진: 김인식> 

 

노스쇼어 병원에서 위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12년 전에 수술한 대장암의 재발 우려를 늦지 않게 확인하기 위해 3년마다 검사하는 감시프로그램의 일환이다. ‘괜찮겠지!’라는 기대와 ‘혹시라도?’ 하는 걱정이 동시에 스쳐 지나간다. 

 

새벽부터 위장을 비우기 위한 시간대별 식사 조절로 당뇨 혈당 수치가 많이 떨어질까 염려되어서 약속 시각보다 1시간 미리 병원에 도착했다. 오후 시간 제일 먼저 검사해주겠다고 배려해주는 병원이 고맙다. 그런데도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 준비가 다 되었다고 해서 내시경 검사실로 이동한다. ‘괜찮을 거야’라고 자신을 안심시킨다. 

 

의사로부터 두 가지 마취 방법에 관해 들었다. 고통 없이 할 수 있는 수면내시경 대신 목 입구에 감각을 둔화시키는 스프레이만 하고서 검사의 모든 과정을 관찰할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 위 내부를 직접 보고 싶었다.

 

드디어 검사가 시작된다. 목 안에 스프레이를 뿌리고 긴급 상황 발생 시 기도를 확보하기 위한 플라스틱 튜브를 물린다. 위내시경 튜브를 밀어 넣는다. 목으로 들어가 식도를 통과하는 동안 서너 차례의 거북함이 있었지만 참을 만했다. 모니터 화면을 통해 불그스레한 위벽이 보인다. 참 신기하다. 내 배 속을 직접 볼 수 있다니.

 

의사가 들고 조종하는 튜브가 내려가다 잠시 멈췄다. 의사는 무언가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불안해진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괜찮다”고 한다. 기록용 사진을 찍었단다. 중간에 몇 차례 더 사진을 찍고, 조직 검사를 위해 시료를 채취했다. 위장의 마지막 부분 닫혀 있는 부위를 통과해 십이지장으로 내려간다. 잠시 관찰하다가 끝났다며 능숙한 동작으로 튜브를 꺼낸다.

 

검사 시간은 7분. 긴장한 탓인지 훨씬 오랜 시간으로 여겨졌다. 의사가 내게 “검사가 잘되도록 참아줘서 고맙다”고 한다. 고맙기는 내가 훨씬 더 고맙지. “별 이상 없다”는 의사의 말에 마음 한구석에 있던 걱정이 싹 없어진다. 한국에서 대장암에 걸릴 위험성이 높다는 의사 진단을 받고 공해가 적은 나라로 가면 암에 안 걸릴 수도 있지 않을까 또는 발병이 많이 늦춰질까 하는 생각으로 왔으니 그런 점에서 나는 이민 성공 사례라 생각하고 감사하며 살아간다.

 

이민 올 때 내 나이는 마흔네 살. 참 용감했다. 그 나이에 온 가족을 끌고 왔으니. 그리고 24년이 흘렀다. 곧 ‘칠순’이라는 생소한 나이가 다가오는데, 아직도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이 뉴질랜드에 첫발을 디딘 그때로 정지되어 있다. 한국말과 영어는 빠르게 후진했다. 필요할 때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내 나이엔 그게 정상’이라고 자신을 위로한다.

 

40년 전 미국 지사에 출장을 갔을 때 파견 근무 중이던 동료 직원이 미국 사람과 여유 있게 영어로 대화하는 것을 보고 ‘나도 영어 쓰는 나라에서 10년 살면 영어는 숙달될 텐데’라고 생각했었다. 뉴질랜드에서 20년 넘게 살았지만, 영어는 한참 뒷걸음질을 하고 있다. ’20~30대와 40~50대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또 합리화시켜본다.

 

한국의 석학 김형석 교수는 <백 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에서 “인생의 황금기는 60세에서 75세까지”라고 했다. 그 말대로라면 나는 지금 그 황금기의 중간에 와 있다. 한참 보람차고 기뻐야 할 시기인데 별로 그렇지 못하다. ‘왜 그럴까?’하고 생각해본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을까?’도 궁리해본다.

 

글쓰기를 배우기로 한 건 잘한 일인 것 같다. 지난해 한인의 날 와이테마타 지역보건부에서 담당하던 ‘무료 대장검사 프로그램’을 홍보하러 ‘아시안 보건 서비스’ 부스에 나가 있었다. 동료 직원이던 ㅈ 선생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훗날 기회가 되면 취미로 하는 사진에 글을 달아 조그만 책이라도 만들고 싶은 생각이 있다”고 한 말이 씨가 되어 지금의 ‘글쓰는 사람들’ 모임에 들게 됐다.

 

일 년 가까이 지났어도 글쓰기는 크게 진전이 없다. 나이 탓이라고 핑계 대어 보지만 사실은 실력이 모자란다. 책도 많이 읽지 않았고 일기나 편지도 별로 써 본 적이 없다.

 

어딘가 내 모자람을 합리화시킬 곳이 필요하다. 이럴 때 옛날 일이 떠오른다. 대구에 살던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담임이 여선생이었는데 공책에 엄청난 양의 글을 베껴 쓰는 숙제를 매일 내주었다. 공부를 잘하는 우리 반 반장과 벌서기를 무서워하는 나, 두 명을 빼고는 모두가 벌을 섰다. 그 바보짓을 오랫동안 계속하느라 내 글씨는 지렁이가 기어가는 필기체가 되어 갔다.

 

결국 한 학기가 지나고서야 그 담임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는데 글씨는 구제 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도 해방된 것만 기뻐했지 글씨를 바로 잡을 생각은 못 했다. 요약하면 노처녀 선생의 히스테리였고 나는 그 희생자였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어머니한테서 들은 이야기는 당시 학부모들이 항의했지만, 그 선생의 변이 “난 학생들이 집에 가서 식사하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빼고 남는 시간에 할 수 있는 분량의 숙제를 내주고 있어요”였단다. 

 

그 뒤 글과 담을 쌓았다. 책 읽기도 싫었다. 글쓰기가 덜 필요한 과목을 선호했고, 이공계로 진학했다. 한국과 뉴질랜드에서 직장 일로 글은 많이 썼는데 대부분 리포트 형식이었다. 사업계획서, 업무보고서, 제품 사용설명서, 고객 상담기록 등 모든 것이 이야기를 풍요하게 하는 감정 표현이나 수식어는 일부러 빼야만 하는 글들이었다. 변명을 늘어놓고 나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그렇다고 못써도 용납되는 건 아닌 게 현실이다. 자연히 모자라는 실력과 그래도 잘 해보려는 노력과 주어진 시간 사이에서 발버둥을 치고 있다.

 

뉴질랜드에 와서 한국 사람은 물론 외국인들도 많이 만났다. 70~80대 노인들도 포함되어 있다. 나이가 들다 보니 한 사람 두 사람 세상을 떠난다. 그때마다 슬프고 서글퍼진다. 자주 못 만나도 오랜 시간 알고 지내며 가까워졌다. 서로 마음속 깊은 이야기들도 나누었다. 집마다 드라마가 될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다. 이민자라서 더 그런 것 같다. 오랜만에 만나면 그간의 세월 흐름이 얼굴에서 보인다. 그들의 눈에는 나도 그렇겠지. 서로 만난 인연이 참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남은 시간 한 사람 한 사람 만날 때마다 따스한 마음을 더 나누고 싶다. 마음의 문을 더 열어야겠다.

 

 

‘글 쓰는 사람들’은 오클랜드를 중심으로 한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한 달에 두 번 모여 좋은 글을 나누며 글쓰기도 하고 있습니다. 네 명이 번갈아 가며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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