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는 사람들(25) 영어 선생님의 변신은 무죄

문학의 향기


 

글쓰는 사람들(25) 영어 선생님의 변신은 무죄

일요시사 0 2889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데본포트 빅토리아 산에서 본 오클랜드 시내 

 

 글_아보카도 나무<필명>

 

 부모님이 영구 영주권을 따기 위해 2년 동안 우리 집에 머물고 계실 때의 일이다. 잘해드린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내가 내 집이 없어 여기 있는 거면 얼마나 힘들까?” 하는 말씀을 종종 했다. 딸네 집이 그렇게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닌 듯싶었다. 그래도 함께 하는 식사시간은 참 좋았다. 부모님, 남편, 딸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하루 동안 힘들었던 일, 억울했던 일, 좋았던 일, 재미난 일들을 이야기했다. 그럴 때면 종종 ‘사는 것이 별건가 이렇게 살면 되지!’ 하는 생각이 들어 혼자서 씩 웃곤 했다.

 “Your father used to be a social study teacher.”(너희 아버지가 사회 선생님이었다면서. 그러니까….)

 아이 픽업을 가려고 차를 빼는 중이었다. 앞집 키위 할아버지가 손짓한다. 보름간 휴가를 간다고 우편물을 모아 달라고 한다. 그러다 이야기가 좀 길어졌는데 그 중에 할아버지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황당하다. 우리 아버지가 사회 선생님이라니.

 아버지는 평생 영어를 가르쳤다. 교장 선생님으로 재직하셨던 정년 퇴임 전 몇 년을 빼고는 대학 졸업 후부터 40년 넘게 서울 근교의 한 중소도시의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이었다. 그것도 유명한 영어 선생님.

 초등학교 다닐 때는 거의 매일 밤 언니 오빠들이 집에 영어 과외를 받으러 왔다. 과외가 시작되면 조용히 숨죽이며 놀거나 엄마, 동생들과 함께 옆집으로 놀러 갔다. 선생님 박봉에 내가 중학교 무렵 이사한 방 세 개짜리 양옥집을 마련하는데 아버지의 족집게 영어 과외 실력은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중고등학교 내내 학교 교무실에 들어갔다 나오면 “제가 12시 5분 전의 딸이야.” 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 유모가 머리를 한쪽으로만 두고 업고 다녀서 목이 약긴 왼쪽으로 기우셨다. 아버지의 딸이라는 사실이 훈장 같기도 했지만 나를 옥죄기도 했다. 이상하리만치 다른 과목만큼 영어는 점수는 오르지를 않았다. 학력고사에서도 영어 점수가 기대한 만큼 나오지 않았다. 맏딸이 당신이 원하는 대학에 못 가게 되자 아버지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성적표만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듯이 “너는 아버지가 영어 선생인데….”라고 말했다.

 그날 저녁 식사시간에 고등어 살을 발라 아버지 앞 접시에 놓으며 슬쩍 말을 건넸다.

 “아버지, 앞집 할아버지에게 사회 선생님이라고 하셨어요?”

 “그래 너희 아버지가 그런다.”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바로 대답했다. 정작 아버지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발라진 고등어 살만 가져다 식사를 하셨다.

 사실 나도 장난기가 발동하여 짓궂게 아버지에게 질문한 것이지 아버지 속내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한국에서 문법 위주로 배워온 영어가 실전에서 효력을 그렇게 많이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경험상 잘 알고 있었다.

 실전에서는 피부도 좀 두꺼워야 한다. 방실방실 웃는 것이 어려운 영어 단어 몇 개를 아는 것보다 훨씬 의사소통에 도움이 많이 된다는 것도 몸으로 배우는 중이었다. 이민을 와서 강산이 한번 변할 만큼 시간이 지나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이 되면 “오케이”, “땡큐” 이런 말만 어색한 웃음과 함께 자동으로 나간다. “현재완료” “현재완료 진행형” 이런 고급 영어는 내 말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아버지는 조용하고 꼼꼼하다. 반면 어머니는 성격이 활달하고 뒤끝도 별로 없다. 어머니 직업은 한평생 가정주부다. 외할아버지가 첩의 생활비를 대느라 대학 마지막 학기 등록금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평생 대학 졸업을 못한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한편 영문과를 다녔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정작 이곳에 와서도 어머니의 영어가 더 효력을 발휘했다. 가까운 세컨드 핸드 숍에 가서 이것저것 물건도 사 오고 영 아니다 싶으면 환불도 해온다. 어머니는 본인이 물건을 환불 받아온 일을 논개가 적장을 껴안고 강물로 뛰어든 일처럼 결연하고 자랑스럽게 저녁 식사 시간에 말씀하시곤 했다. 딸들은 “와! 할머니 멋져요!”를 연발했다.

 집안 식구들이 온종일 나가 있는 동안 그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앞집 키위 할아버지, 할머니를 초대한 것도 어머니였을 거라고 짐작된다. 어머니의 그 당당한 영어 앞에서 아버지는 어느새 사회 선생님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부모님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서 지금 시골에서 생활하신다. 동네에는 연세 드신 분들이 많아 아직 팔십이 안 된 어머니는 젊은 축에 속한다. 마을회관에서 식사하면 설거지는 당연히 어머니 차지이다.

 그 시골에서 “정으로 보내는 거다”하시며 가끔 직접 말리신 태양초 고춧가루 등을 챙겨서 뉴질랜드로 보내주신다. 시골 읍내 우체국 직원이 다가와서 조용히 물어본다고 한다. 

 “할아버지, 한글은 아셔요?”

 “…몰라, 자네가 좀 도와줘….”

 허리가 부실한 아버지를 대신해서 심성 고운 우체국 직원은 무거운 소포를 옮겨준다. 그리고 뉴질랜드 우리 집 주소와 한국 부모님 댁 주소를 영어와 한글로 또박또박 적는다.

 영어 선생님에서 사회 선생님. 그리고 다시 일자무식 시골 노인네로 아버지의 변신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 아버지를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난 아버지가 참 좋다.

  

‘글 쓰는 사람들’은 오클랜드를 중심으로 한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한 달에 두 번 모여 좋은 글을 나누며 글쓰기도 하고 있습니다. 네 명이 번갈아 가며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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