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는 사람들(28) 타잔이 되고 싶었던 시절

문학의 향기


 

글쓰는 사람들(28) 타잔이 되고 싶었던 시절

일요시사 0 2878

“으아~아~아….”

 

벌써 50여 년 전의 일이다. 흑백텔레비전에서 타잔을 만났다. 그 뒤 나는 타잔앓이를 했다. 낮에는 동네에 사는 친구들과 타잔처럼 외치고 다녔다. 밤에는 타잔이 되어 악어랑 싸우는 꿈을 꾸었다. 타잔이 되어 악당을 다 무찌르고 싶었다.

 

텔레비전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있으면 텔레비전이 있는 집으로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수요일인지 토요일인지 생각도 안 난다. <타잔>을 하는 날만 되면 약속이나 한 듯 꼬마들은 동네에 있던 커다란 철강 공장의 공장장 사택으로 모였다. 그리고서는 얼굴이 유난히 하얬던 그 집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 집 식구는 소파에 앉고 나를 비롯한 동네 꼬마들은 바닥에 앉아 <타잔>을 보았다. 악당을 무찌를 때는 내 엉덩이가 들썩들썩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모든 일을 혼자서 해결하는 타잔, 아무리 악당들이 총을 잘 써도 맨손으로 그들을 다 물리치는 타잔, 필요할 때는 커다란 코끼리도 부를 줄 아는 타잔은 나의 영웅이 되었다.

 

한동안 나는 정글의 왕이었던 타잔처럼 행동했다. 나무에서 뛰어내리면서 “으아~아~아…”라고 소리를 질렀다. 다른 아이보다 더 높은 데서 뛰어내렸다. 여러 마리의 코끼리가 울부짖으며 달려오는 모습을 상상했을 때 온몸에 짜릿한 경련이 일었다. 사자하고 싸우는 장면을 생각하며 지나가는 옆집 개한테 돌을 던졌다. “깨겡”하는 소리를 내며 도망가는 개를 보면서 큰소리로 웃었다. 나는 타잔이 되고 싶었다.

 

남들한테는 숨겼지만, 사실은 높은 데서 뛰어내릴 때 무서웠다. 어떨 때는 눈을 감아버려 앞이마가 땅을 찢기도 했다. 물론 아프다는 말도 못 했다. 옆집 아줌마의 개한테 돌을 던지고 싶지는 않았다. 개가 울부짖는 소리에 가슴이 아팠다. 아줌마의 화난 얼굴이 무서웠다. 하지만 이런 모습들은 동네에서 같이 놀던 친구들한테 보여주지 않았다. 그들이 놀리고 따돌리까봐 두려웠다. 그들과 놀고 싶어 나의 연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오랫동안 타잔놀이를 했다. 타잔처럼 행동하면 행복하고 남들이 좋아할 줄 알았다. 인기를 얻으려고 연약하고 쉽게 겁먹는 모습을 감추려 하니 힘들었다. 가끔가다 타잔도 싸움에 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나도 변명거리를 만들어 무모하게 지붕 위에서 뛰어내리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타잔은 지는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이삼 학년이 되어서는 배트맨이 나의 영웅이 되었다. 타잔은 맨손으로 악당들을 물리쳤지만, 배트맨은 특별히 만든 옷을 입고 첨단 과학 기술을 이용해 나쁜 놈들을 혼내주었다. 타잔처럼 빨리 뛰거나 수영을 잘할 필요가 없었다. 나도 배트맨처럼 검은 망토를 걸치고 날아다녔다. 로빈이라는 조수 겸 친구와 같이 세계를 구하고 싶었다. 신무기만 가지고 있으면 최고가 될 수가 있었다. 동네 아이들보다 더 세련된 망토를 사 달라고 엄마한테 조르길 시작했다.

 

엄마한테 많이 맞았다. 조르다가 맞고 울다가 맞기도 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나은 망토만 있으면 아이들이 다 날 좋아할 것 같았다. 그리고 동네에서 제일 뽐나는 배트맨이 될 수 있을 텐데 라고 공상을 했다. 현실에서는 그 망토를 사주지 않는 엄마가 미웠다.

 

어느 날인가 아버지가 골드스타(금성) 텔레비전을 사 오셨다. 날마다 삼십 분씩 걸어 시장으로 텔레비전 보러 가는 막내아들이 안쓰러웠는지 동네에서 두 번째로 텔레비전을 장만하셨다. 구멍가게를 운영하면서 얼마나 많은 돈을 모아서 텔레비전을 샀는지는 어려서 몰랐다. 지붕 위에서 아주 높다란 안테나를 설치하던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자랑스럽게 보였다. 엄마보다 아버지 말씀을 잘 듣기 시작한 순간이 아마 그때였을 거다.

 

우리 집에 텔레비전이 있다는 소리는 반나절도 안 걸려 동네에 퍼졌다. 동네 꼬마들이 저녁만 되면 우리 집으로 텔레비전을 보러 왔다. 물론 태현실과 장욱제가 열연한 <여로>가 방송되었을 때는 동네 어른들도 우리 집으로 방송시간에 맞춰 왔다. 아이, 어른 구분 없이 “여기 앉으세요.”, “저기 앉으세요.”라고 명령을 내렸다. 지금 생각하면 참 버릇없이 굴었지만 그때는 기분이 참 좋았다. 다들 내 말을 고분고분하게 잘 들었으니까 말이다.

 

텔레비전은 나에게 많은 걸 가져다주었다. 타잔이나 배트맨이 되어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텔레비전을 보여주는 조건으로 어떤 친구들은 학교에 갈 때 가방까지 들어주겠다 한다. 가끔가다 가게에서 훔친 사탕을 그들에게 나눠 주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잘나지도 못하면서 동네에서 우쭐거리길 시작했다.

 

‘우물 안 개구리’라는 속담의 참뜻은 한참 뒤에 알았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우리 동네가 가난한 곳이란 것을 깨달았다. 5학년 때였나. 친구의 생일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공책 한 권을 들고 그 아이의 집에 간 날 다른 아이들은 연필깎이 기계, 스케치북 같은 비싼 선물을 들고 왔다. 공책을 내밀 때 조금 손이 떨렸다. 그 집 거실에 놓여있었던, 학교에서 보던 풍금보다 훨씬 큰 검은 색의 피아노를 그의 누나가 치기 시작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를 큰 소리로 불렀다. 잘 사는 그 아이의 모습에 기가 죽은 나를 보여주기 싫었다.

 

50cc 오토바이를 몰고 구멍가게에 비치할 물건을 사러 매일 시장으로 향하는 아버지가 갑자기 생각난다. 예전에는 오토바이 뒤에 앉아 타잔이나 배트맨이 되는 상상을 했다. 오늘은 때 묻은 점퍼를 입고 오래된 오토바이를 타는 아버지를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친구의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실까?’라고 궁금해하며 친구가 부러웠다.

 

예순이 다가오면서 옛날을 돌아보는 일이 잦아졌다. 키가 크다고 동네 어른들이 “이놈은 장군감이야.”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 얘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힘이 센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그 모습은 시간에 따라 변해갔다. 타잔에서 시작해서, 배트맨이 되어갔고, 그리고 텔레비전을 가지고 있는 구멍가게 주인의 아들로 으스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살아오면서 많이 실패했다. 타잔과 배트맨처럼 강한 남자도 못 되었고 은행 융자를 어떻게 갚을까를 걱정하는 힘 없는 남자로서 살아가니까 말이다. 그렇더라도 남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인정받기 위해 노력은 했다. 장군은 되지 못했지만 그 아픔을 숨기지 않고 표현하는 사람은 되었다. 삶이 가끔가다 힘들어질 때는 나의 아픈 속을 보여주는 그런 모습이 아름답다고 위로한다. 그리고 “나도 한때는 잘 나갔거든,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도 있었어. 그것도 칠십 년도 초반에…”라고 웃는다.

 

타잔놀이를 하며 텔레비전을 가지고 큰소리치던 그 시절이 그립다. 부모님과 동네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그들과 <타잔>이나 <여로> 같은 프로그램을 다 같이 다시 보고 싶다.

 

글 쓰는 사람들은 오클랜드를 중심으로 한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한 달에 두 번 모여 좋은 글을 나누며 글쓰기도 하고 있습니다. 네 명이 번갈아 가며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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