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언어 여실지(필명)
20세기 초 뉴질랜드 출신 위대한 과학자 러더퍼드의 실험으로 원자핵이 발견되고 그 주위를 도는 전자의 출현으로 이 세계의 기본구성원리가 제시되었다. 이 세계의 모든 존재(인간까지 포함) 가 이러한 토대 위에서 생명체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우리가 볼 수 없는 미시세계로 들어가면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모든 것은 움직이고 흐른다. 그 움직임을 생성이라 부른다. 이 세계 전체가 생성의 리듬 속에 춤추고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생명력이라 부른다. 여기가 니체가 말하는 삶과 만나는 지점이다. 이 생명의 힘이 스스로 그러함(자연)의 토대가 된다.
어느 날 이 고요한 침묵의 움직임 속에 인간이 나타나면서 문제가 생긴다. 인간의 인식이 나타나기 전부터 이 세계는 스스로 작동하고 있었다. 인간은 이 흐르는 움직임을 고정하려 한다. 붙들어서 소유하려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언어다.
언어가 개입되면서 이 세계의 실제 모습은 인간들이 바라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인간의 인식이 개입되면서 스스로 그러한 생성의 흐름을 하나의 모습 속에 가두어 두려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니체는 여기에 제동을 건다. 그는 생성으로 다시 시선을 돌린다. 삶은 생성의 관계 속에서 펼쳐진다고 보았다. 그 활발한 변화의 흐름 속에 개인의 삶의 의지가 약동한다고 본 것이다.
이 점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무아와 만날 수 있는 맥락이 보인다. 선불교의 참선이나 활구선도 마찬가지라 본다. 생성은 끊임없이 변화를 지속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는 어떤 위치를 차지할 수가 없고 절대공간도 붙잡을 수 없다. 그래서 사실 측정량을 숫자로 표현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양자 물리학의 입장)
인간은 이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 자기 방식대로 세계를 표현하고 인식한다. 인간은 삶을 이루기 위해 생성의 흐름을 존재화시켜 자기 곁에 두려 한다. 니체는 이를 ‘힘을 향한 의지’라 말한다.
니체의 도덕 외적 진리와 거짓에 따르면 인간의 언어와 사물의 본래 모습은 별 관계가 없다. 언어가 사물에 허상을 뒤집어씌운 것이니 그것으로 원인과 결과를 논리적으로 따지는 자체가 코미디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세상을 분류하고 같은 집단으로 과감히 묶어버리고 그 결과에 엄청난 권리를 부여하기도 한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생각하고 길들여진다. 이러한 분별 인식 이전에 우주의 만물은 스스로 침묵하면서 움직이고 이루어 가고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는 언어 때문에 실제 모습에 도달할 수 없고 언어는 사물을 지시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다만 수단으로서 소통의 도구로서 기능할 뿐이며 그들의 목적은 효율성이다. 그래서 불교가 언어도단 불립문자 심행처멸을 외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어를 통한 진리는 없다고 비트겐슈타인은 단언한다. 미셸 푸코도 말과 사물에서 주체의 죽음을 보이면서 말과 실제는 일치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저것이 나무라 할 때 우리는 그 말이 나무를 지시하고 의미를 전달한다고 믿고 있으나 나무라는 언어와 저 실제는 무관한 것이고 다만 서로가 일치한다고 가정했을 뿐이다. 여기에 인과율이 적용될 수가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우리가 철석같이 믿는 진리마저 인간중심으로 사유한 언어를 통해서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언어를 결코 버릴 수 없는 것도 인간의 운명이다. 이 실제를 만나려 아무리 애를 쓰고 명상을 하고 참선을 해도 또한 직관적인 영적 체험을 한다고 하더라도 언어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 만약 깊은 명상을 통해 언어를 넘어서는 그러한 경계를 만난다고 하더라도 증명할 길이 없고 표현할 방법도 없다.
언어라고 하는 2차적인 범주를 거쳐야 우리는 실제의 그림자라도 볼 수가 있다. 이 언어의 이중성이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번뇌와 망상의 근본무명이라 본다.
인간을 위해서 이 세계를 고정시키고 더 나아가서 수사학적으로 쓰이고 옮겨지고 장식된 인간관계의 총합을 개념이라 말한다. 인간 중심적으로만 세계를 해석하고 생명력을 죽여버리는 체계적인 집합을 개념이라 부른다. 모든 인간의 역사는 개념으로 학문을 이루고 해석한다고 보았다.
인간의 감각적인 은유의 생명력을 지워버리고 점점 개념화시켜 놓은 것이 현재 우리 앞에 나타난 진리라 말한다. 은유를 망각한 환상이란 것이다. 너무 오래 사용해서 마모된 채로 감각적 힘을 상실한 것이 바로 진리라 한다. 니체는 진리조차도 인간관계의 총합이라고 던진다.
사물의 본래 모습 자체도 움직이고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직접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다만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감각에 바탕을 둔 그 느낌은 은유로 표현된다. 니체는 말한다. 은유는 생성을 인정하고 다의성(여러 가지 뜻)도 받아들인다. 즉 우리는 언어로서 실제를 인식할 수 없고 의미를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이것은 데리다의 차연의 개념과 통한다.)
다시 말해 은유는 언제나 열려 있다는 것이다. 다의성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 은유마저도 점점 딱딱해져서 뼈처럼 굳어버리고 화석화된다고 말한다. 그것이 담론화된 것이 교리이고 도그마이며 신념의 체계로 이데올로기화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종교 제도와 국가권력과 함께 진리를 절대화시키고 근본화시키면서 비극의 역사를 끌고 간다고 폭로하는 것이 니체의 계보학이다. 또한 이러한 그의 바탕을 수용하여 새롭게 펼치고 있는 것이 포스트 모더니즘이며 해체주의다.
감각된 것을 그대로 표현하려는 은유는 시인에 의해 드러난다고 니체는 말한다. 인간이 생성을 만나는 최초지점에 시인이 있었다고 한다. 니체의 역작 자라투스트라도 은유로 표현된 리듬이 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