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는 사람들(37) 찻잔에 담긴 시간

문학의 향기


 

글쓰는 사람들(37) 찻잔에 담긴 시간 <글_아보카도 나무>

일요시사 0 2507

<사진: 김인식> 

 

 

 피부에 닿은 햇살이 사각거린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사과를 한입 베어 물은 것 같은 상큼한 공기. 나는 이런 것들을 그리워할 것이다.

 저만치서 키위 할머니가 활짝 웃는다. 이민 초기에는 내 뒤에 누가 있나 하고 고개를 돌리곤 했다. 지금은 자연스럽게 웃으며 “굿 모닝”하고 화답을 한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웃음꽃을 건네는 여유. 이 또한 아쉬워할 것이다.

 나와 아이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기 위해 이민을 결정했다. 앞만 보고 15년을 달렸다. 가끔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나를 당겼다. 그러나 한국을 떠나와 산 세월이 길어질수록 막상 돌아가기가 무서웠다. 그러다 올여름 백 년 만의 더위에 아버지는 체중이 많이 빠져서 병원에 입원하고 어머니도 덩달아 힘들어했다.

 급히 한국에 갔다. 부모님의 시골집 가스렌즈 위에 놓여있는 냄비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눈이 잘 안 보이는지 아니면 기력이 달리는지 김치찌개가 남겨져 있는 냄비는 때가 덕지덕지 끼어있었다. 냄비를 닦고 있자니 저절로 어금니가 꽉 깨물어진다. 이제 부모님이 독립적으로 사실 수 있는 시간이 끝났다.

 결정을 내리는 데는 시간이 그렇게 많이 걸리지 않았다. 머리보다 가슴으로 내리는 결단이다. 다만 내가 한국으로 가면 남겨질 아이들이 걱정이다. 아이들에게 묻지도 않고 부모들이 결정해 이민을 왔다. 이제 아이들만 뉴질랜드에 놓고 간다. 헛웃음만 나온다. 그래도 아이들은 밥은 제 손으로 해 먹을 수 있다. 처음에야 힘들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스스로 위로한다.

 한국에 가면 부모님 아파트로 들어가야 한다. 이미 시골 살림을 아파트로 옮겨놓아서 발 디딜 틈이 없다. 이삿짐센터에 물어보니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짐은 라면 상자 여섯 개 분량이다.

 집안의 물건을 볼 때마다 이 물건이 라면 상자 여섯 개 안에 들어갈 가치가 있나 없나를 따져본다. 뉴질랜드에 와서 산 세월이 길다. 단출하게 살자고 말은 했지만, 살림살이가 여간 많은 게 아니다.

 먼저 가장 만만한 부엌살림부터 살펴본다. 서랍에는 찻잔이 서른 개가 넘는다. 아이들이 얌전하고 나도 손이 거친 편이 아니다. 물건을 한번 사면 어지간해서 깨뜨리는 적이 없다. 한 번 우리 집 부엌 식구가 된 찻잔은 영원한 식구가 된다. 이 중에 내가 한국으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한두 개이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손잡이가 잠자리 모양의 컵이다. 독특하다. 보는 사람마다 신기한 듯 한마디 한다. 첫 봉급을 타서 큰마음 먹고 나를 위해 산 찻잔이다. 이민 올 때도 들고 왔다. 함께한 세월이 삼십 년이다. 이걸 다시 한국으로 가져가야 할까?

 손이 닿기 편한 위치에는 하얀 사기 머그잔이 있다. 처음 이민 왔을 때 가까이 살던 민희 엄마가 사주었다. 고양이 두 마리가 빨강 파랑 조끼를 입고 커피를 마시고 있다. ‘뉴질랜드 이민 왔으니 행복하게 알콩달콩 사세요’ 하고 말하는 것 같다. 이것은 못 버린다.

 고양이 그림 머그잔 옆에는 같은 모양의 갈색 컵 여섯 개가 어깨를 맞대고 있다. 제법 묵직한 컵인데 갈색 바탕에 진한 밤색의 세로무늬가 참 편안한 느낌을 준다. 같은 교회 다니는 마리안이 준 것이다. 은퇴해서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부엌 짐을 줄이고 싶어 했다. 눈썰미가 좋은 그는 이미 나에게 같은 무늬의 중간 크기 접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작은 접시, 큰 접시와 함께 컵을 주었다. 손님이 오면 작은 접시는 앞 접시로 사용하고 큰 접시에는 일품요리 하나를 모양새 좋게 담아 내놓는다. 중간접시에는 김치를 담으면 안성맞춤이다. 접시와 컵이 손님상을 고급스럽게 만들어 준다. 이것은 얼마 전에 이민 온 새영이네에게 주고 싶다. 나처럼 요긴하게 잘 사용하겠지. 시원섭섭하다. 시집 보내는 것 같다. 

 서랍 중앙에는 노란색 컵이 있다. 반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이 있는 머그잔이다. 몇 년 전 일이다. 스마트 폰에 낯선 전화번호가 찍혔다. 영국에 간 딸아이가 아프다고 연락이 왔다. 다음 날 당장 영국으로 날아갔다. 비행기를 세 번 갈아타고 이틀 넘게 걸려 도착해 보니 딸아이가 많이 여위었다. 뉴질랜드로 바로 데려오려고 하는데 비행기 시간이 잘 맞지 않았다. 하루를 영국에서 더 머물러야 했다. 그때 들린 대영박물관에서 이 잔을 샀다. 노란 해바라기에서 희망이 느껴져서 마음이 끌렸다. 지금도 이 머그잔에 커피를 마시면 두 손으로 컵을 꼭 쥐게 된다. 이 컵도 가져가도 싶다.

 찻잔 하나도 쉽게 정리를 못 하고 감상에 젖어 시간만 끈다. 짐 정리가 생각보다 힘들 것 같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 엉뚱한 데로 튄다. 한국으로는 라면 여섯 상자 분량의 짐을 가져가지만 죽을 때는 이것마저 다 버리고 가야 하는구나 하는 깨달음이다.

 하늘로 돌아갈 때는 한 상자 분량의 짐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 한국에서 뉴질랜드에 이민을 왔고 다시 뉴질랜드에서 한국으로 돌아간다. 누구나 하는 경험은 아니다. 한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옮기면서 이 세상에서 저세상으로 가는 연습을 미리 해보는 듯하다. 나쁘지만은 않다.

  

‘글쓰는 사람들’은 오클랜드를 중심으로 한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한 달에 두 번 모여 좋은 글을 나누며 글쓰기도 하고 있습니다. 네 명이 번갈아 가며 연재합니다.


[이 게시물은 일요시사님에 의해 2018-12-12 09:29:00 교민뉴스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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