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앎, 그리고 낢 ; 석운(필명)

문학의 향기


 

삶과 앎, 그리고 낢 ; 석운(필명)

일요시사 0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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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과 낢을 추구하며 방황했던 그때의 삶이 지금도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젊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돌아와야 한다. 방황은 끝이 있기에 낭만도 있고 아름다움도 있다. 끝이 없는 방황은 혼돈과 헤맴 뿐이다.

 

삶은 앎이 아니고 사는 것이었다. 이 단순한 진리를 젖혀놓고 먼 길을 방황하다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돌아왔을 때 많은 이들은 이미 꽤 나이가 들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나도 그중의 하나다. 늦게라도 이 진리, ‘사는 것으로 돌아오면 그래도 다행이다. 남은 삶을 제대로 살 기회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어떤 이들은 끝내 이 진리를 알지 못하고 계속 헤매다가 삶을 끝내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사람의 삶의 대부분은 사는 것보다는 오히려 어떤 목적을 위해 허비되는 경우가 많다. 또 많은 사람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훌륭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목적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 명예, 권력을 위해 아낌없이 삶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아주 많다.

요즘 젊은이 중에는 명품 의상이나 가방을 몸에 걸치기 위해 또는 명품 차를 몰기 위해 그들의 삶을 소비하기도 한다. 젊었을 땐 삶이 영원히 계속되리라 생각하기에 이렇게 허비되고 있는 삶에 대한 개념이 희박할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사는 것이 별거냐고 이런 모든 것이 사는 것이 아니냐고 항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의 삶이 어떤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은 사는 것이지 어떤 목적을 위해서라도 희생되거나 소비될 수 없는 귀한 것이다.

 

앎을 위해 소비된 삶

지금 돌아보면 내 삶의 대부분은 앎을 위해 소비되었다. 철부지 시절에는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았을 테니 오히려 사는 것같은 삶을 살았을지 모르겠다. 철들면서부터는 언제부터인지 삶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삶이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주어진 것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를 알려고 노력할 수는 있어도 피조물인 우리가 삶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는 노력은 처음부터 가능성 없는 시도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사는 것이지 알아야 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뿐이 아니고 꽤 많은 사람이 나와 같은 오류를 범하며 살면서 자신의 삶이 올바른 혹은 꽤 괜찮은 삶의 궤도를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앎은 처음에는 겸손한 자세로 시작된다. 마치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던 동굴에 첫발을 들일 때 두 눈을 크게 뜨고 조심스럽게 발을 떼는 마음가짐과 같다. 일단 동굴 안에 들어와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고 발이 안정되기 시작하면 차츰 마음가짐이 바뀐다.

처음엔 동굴 속에 무엇이 있는지 그 끝이 어디로 통하는가만을 알려는 마음이었지만 안으로 한 발짝씩 들어가면서는 동굴이 언제 생겼는지 동굴 안에 어떤 생명체가 살고 있는지 동굴을 형성하고 있는 바위나 흙의 종류는 무엇인지와 같은 부차적인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이 생긴다. 급기야는 동굴은 도대체 왜 생겼고 동굴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와 같은 궁극적 질문도 생기고 그 해답도 알기를 원한다.

삶이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 시작한 앎의 행위도 이와 비슷하다. 삶에 관한 책들을 읽고 생각하며 스승이나 선배에게 배우며 무엇인가를 조금씩 알게 되면 어느 사이에 삶을 탐구하던 앎은 지식욕을 채우기 위한 앎으로 바뀐다. 앎의 대상이었던 삶은 어느새 옆으로 밀려나고 앎 자체가 목적이 된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여러 욕심이 있지만 그중에 가장 늦게까지 떨치기 힘든 욕심이 지식욕이 아닌가 한다. 나이 들며 육신이 약해지면 절로 쇠하는 식욕이나 성욕과 달리 마음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지식욕은 여간해서 떨치기가 힘들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가장 위험한 유혹이 지식욕이라고 그의 참회록에서 밝히며 성서에서는 이를 가리켜 안목의 정욕이라고 했다고 고백했다.

그가 염두에 두었던 성서 구절은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한 요한1 216절이었을 것이다.

처음엔 삶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시작된 앎의 행위가 시간이 지나면서 지식욕(안목의 정욕)으로 바뀌고 뒤이어 이생의 자랑으로 이어진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찾아 읽으면서 나는 무릎을 치며 통감했다. 삶 또는 삶을 알려주는 진리를 알고 싶어 시작했던 나의 앎의 여행이 지식이 쌓이면서 어느새 삶과는 상관없는 지식을 거들먹거리며 이생(세상)의 자랑을 삼고 있었던 것이었다.

 

낢을 꿈꾸며

그뿐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좀 아는 것같이 느껴지자 점점 교만해져 앎을 벗어나 낢을 꿈꾸고 있었다. 삶이 사는 것이듯 낢이란 나는 것이고 날개 달린 존재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날개 달린 존재는 하늘을 날 때 그 존재가 온전하게 된다. 지상으로 내려왔을 때 그들의 존재는 불완전하게 되고 지상의 날개 없는 존재들의 조롱거리가 된다.

시인 보들레르는 그의 시() ‘알바트로스에서 갑판 위에 한번 몸이 놓이기만 하면 이 창공의 왕자는 서투르고 수줍어 불쌍히도 그 큰 하얀 날개를 질질 옆구리에 노처럼 끈다고 개탄했다.

반대로 날개가 없는 존재가 낢을 꿈꿀 때는 비극이 예고된다. 이무기가 천 년을 참고 기다려도 용이 되어 하늘을 날기가 쉽지 않은데 백 년도 못사는 인간이 낢을 꿈꾸면 날기는커녕 잘못 시도하다가 땅으로 추락하여 크게 다치거나 목숨마저 잃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물 중 유일하게 두 발로 걸을 수 있기에 두 팔이 자유로운 인간은 어제도 오늘도 낢을 꿈꾼다. 섣불리 하늘을 날다 추락해 죽은 이카로스(Icarus)의 신화를 알면서도 계속해서 낢을 꿈꾸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일까 아니면 교만일까?

프랑스의 시인 데뽀르뜨(Philippe Desportes 1546~1606)이카로스는 여기 추락했다라는 그의 시()에서 그는 높은 모험을 추구하다 죽었다. --- 그건 보다 아름다운 목표인가, 아니면 보다 화려한 묘()인가라고 끝을 맺었다.

삶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젊음의 많은 시간을 앎을 위해 허비하다가 고희(古稀)를 넘긴 지금 지난 세월을 뒤돌아보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더더구나 앎을 추구하다 앎을 자랑하다 못해 낢까지 시도했던 지난날의 치기가 떠오르면 쑥스럽고 부끄러워 혼자 얼굴이 붉어진다.

며칠 전 타카푸나에서 열리는 선데이 마켓에 들렸다. 뜨거운 여름 햇볕 아래 손수 심고 거두어서 들고나온 과일 채소 꽃을 팔면서 얼마 안 되는 돈을 건네는 손님들에게 함박웃음과 더불어 땡 큐를 연발하는 순박한 농부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 삶은 앎이 아니라 사는 것이라는 진리를 되뇌었다. 순리에 따라 사는 것으로 삶을 받아들인 그들은 결코 삶을 앎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농사가 잘된다고 돈이 좀 들어왔다고 결코 땅을 버리고 하늘을 향해 헛된 날갯짓을 하는 을 꿈꾸지도 않을 것이다.

 

지혜는 시간과 더불어 온다

예이츠(W B Yeats 1865~1939)의 시() 지혜는 시간과 더불어 온다를 읽은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비록 잎은 많아도 뿌리는 하나
내 젊음의 거짓된 나날 동안
햇빛 속에서 잎과 꽃을 마구 흔들었지만
이제는 진실 속으로 이울어 들리

 

그랬다. 육신에 젊은 피가 끓고 눈에 보이는 것이 세상의 전부인 것 같이 느껴지던 그때에는 뿌리는 보이지 않는다. 햇빛 속에 반짝이는 아름다운 잎과 꽃을 모두 갖고 싶고 또 가졌으면 마구 흔들어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젊음은 끝없이 계속될 것이고 자고 깨면 내 앞에 다가오는 매일은 결코 나를 저버리거나 속이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육신을 휘돌던 뜨거운 피가 식고 한여름 더위 속에서도 어딘가에서 이미 불고 있는 서늘한 가을바람이 느껴지는 나이가 된 이때 비로소 젊음의 나날이 얼마나 미망(迷妄) 속에 지나갔는지를 깨닫는다. 그래도 그 젊음이 아름다웠던 것은 사실이다. 앎과 낢을 추구하며 방황했던 그때의 삶이 지금도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젊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돌아와야 한다. 방황은 끝이 있기에 낭만도 있고 아름다움도 있다. 끝이 없는 방황은 혼돈과 헤맴 뿐이다.

예이츠가 그의 시에서 끝으로 읊었듯 이제는 진실 속으로 이울어 들때이다. 그리고 진실이란 주어진 남은 삶을 그 삶을 주신 창조주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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