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7
<1923년 1월 6일~1974년 8월 31일>
총리 재임 딱 21개월, ‘보통 사람 가운데 가장 보통 사람’
노먼 커크는 노동당 철학을 이렇게 강조했다. “좋은 집을 마련해 주고,
건강을 지켜주고, 완전고용을 추구하고, 평등한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는 어떤 국회의원보다 설득력 있고 자신이 넘치는 연설로 주목을 받았다.
120kg이 넘는 거구에서 뿜어 나오는 비전은 서민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친밀함’은 한 나라를 이끌어 나가는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 가운데 하나다. 강력한 지도력이나 앞날을 읽는 혜안도 있어야겠지만 대중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는 지도자라면 그런 것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지도자의 나라’가 아닌 ‘국민의 지도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오래전 한국에도 그런 흉내를 낸 지도자(대통령)가 있었다. ‘보통 사람의 시대를 열겠다’던 그 지도자는, 보통 사람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저질러 결국 감옥에까지 가는 수모를 겪었다. 아주 남다른 ‘보통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 지도자였다.
열두 살에 정식 교육과 이별해
노먼 커크를 기억하는 키위들은 그를 ‘뉴질랜드 보통 사람들의 챔피언’이라고 말한다. ‘키위들 가운데 가장 평균의 키위’라는 뜻이다. 한 나라의 총리까지 지낸 그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삶이 소탈하고 평범했다는 증거다.
노먼 커크는 1923년 1월 6일 캔터베리 와이마테(Waimate)에서 태어났다. 신문도 볼 수 없었고 라디오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집이었다. 초등학교를 마친 커크는 더는 학업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가난은 열두 살 남자아이로부터 학업의 기회를 빼앗아갔다. 그걸로 정식교육과는 이별해야만 했다.
어린 시절은 버거운 시간의 연속이었다. 지붕 페인트 보조, 가스 용접공, 허드레 청소일, 시간제 소방수 일 등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고 집안 살림에 힘을 보탰다. 10대 중반치고는 너무 일찌감치 삶의 고달픔을 맛보았다.
이런 이력은 서민의 애환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산이 됐다. 훗날 노먼 커크가 서민 사회복지에 애쓴 이유가 여기에서 비롯했다.
1943년 커크는 스무 살 젊은 나이에 동갑내기 처녀 루스 밀러(Ruth Miller)와 화촉을 밝혔다. 이때부터 집안 살림이 조금 나아졌다. 유제품 공장에서 보일러 기사로 일했으며, 넓은 땅을 사서 직접 집을 지었다.
자치단체 역사에서 가장 나이 어린 시장돼
노먼 커크는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결혼한 해에 노동당에 들어가 바지런하게 활동을 해 나갔다. 10년 뒤인 1953년 서른 살에 카이아포이(Kaiapoi, 크라이스트처치 인근의 아주 작은 도시)의 시장이 됐다. 뉴질랜드 자치단체장 역사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시장이었다.
나이는 어렸지만 그는 일을 능숙하게 해냈다. 나이 든 관료들이 커크의 꼼꼼한 일 처리에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였다. 현장을 찾아다니며 시민들의 고충을 듣고 시정에 반영했다. 밤늦도록 자료를 찾아보면서 시민들이 편안하게 살게 할 방도에 대해 고민했다.
이듬해인 1954년 시야를 넓혀 국회의원 선거에 나갔지만 당선에 실패했다. 3년 뒤 다시 뛰어들어 성공했다. 표차는 567표, 박빙의 승리였다. 1962년 노동당 부총재를 맡았고 이듬해에는 총재가 됐다. 1965년에는 당에서 제일 높은 지도자였던 아널드 노드마이어(Arnold Nordmeyer, 1901~1989)를 제치고 국회의원으로 일한 지 7년 만에 노동당 우두머리가 됐다.
노먼 커크는 노동당 철학을 이렇게 강조했다.
“좋은 집을 마련해 주고, 건강을 지켜주고, 완전고용을 추구하고, 평등한 기회를 주는 것이다.”
노먼 커크는 어떤 국회의원보다 설득력 있고 자신이 넘치는 연설로 주목을 받았다. 120kg이 넘는 거구(애칭으로 ‘빅 놈’, Big Norm이라고도 불림)에서 뿜어 나오는 비전은 서민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노동당은 1966년과 1969년 두 차례 선거에서 졌다. 노먼 커크가 당 지도자로 진두지휘했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하지만 누구도 패인을 그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당 동료는 물론 국민들도 그를 버리지 않았다.
두 번 진 뒤 1972년 총선에서 이겨
1972년 ‘이제는 바꿀 때’(It’s time for a change)라는 구호를 걸고 세 번째 도전에 나섰다. 많은 국민이 노먼 커크에게 표를 던졌다. “이제는 한번 잘해 보라”는 주문이었다. 삼세번 도전 끝에 얻은 승리인 만큼 노먼 커크의 투지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가 총리로 일한 21개월 동안 뉴질랜드는 나라 안팎으로 여러 복잡한 문제에 허덕였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커크는 문제를 하나하나 지혜롭게 풀어냈다.
1973년 2월 와이탕이에서 노먼 커크는 한 마오리 남자아이와 정답게 손을 잡고 걸었다. 이 장면은 다음날 신문 커버를 장식하게 되고 훗날 파케하와 마오리 사이의 평화의 상징이 된다. 앞으로는 파케하도 마오리도 아닌, 뉴질랜더(New Zealander)로 함께 잘 살아나가자는 뜻이다.
같은 해 노먼 커크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럭비팀 스프링복(Springbok)의 뉴질랜드 입국을 거부했다. 인종차별정책을 쓰는 나라의 선수들을 들어오게 할 수 없다는 뜻을 담은 조치였다. 럭비 팬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결과적으로 이 일은 남아공이 인종차별정책을 폐지하는 데 한몫 했다.
또 노먼 커크는 프랑스가 남태평양에서 핵실험을 실시하겠다고 하자 뉴질랜드 배를 직접 현장에 보내 이를 저지하려고 했다. 뉴질랜드 정부는 프랑스를 국제사법재판소에 고소해 핵실험의 부당성을 전 세계에 알렸다.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나라들인 미국과 중국에도 할 말은 했다. 미국이 칠레의 쿠데타를 간접 지원해 대학살이 일어나자 유엔 연설을 통해 ‘당장 중지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친중국 정책을 채택해 앞 정권들이 보여준 두리뭉실한 대중국 정책을 강단있게 정리해 놓았다.
1974년 쉰하나에 심장병으로 눈 감아
나라 안팎의 복잡한 문제를 육중한 체격만큼이나 당당하게 해결해 나가며 그의 인기는 올라갔지만 뉴질랜드 경제는 별로 좋지 못했다. 운 나쁘게도 집권 당시 전 세계에 석유파동이 일어나 뉴질랜드 경제도 직격탄을 맞았다.
쉬지 않고 일한 탓에 건강이 갑자기 나빠졌다. 휴가도 반납한 채 일에 빠져 ‘더 잘 사는 뉴질랜드’를 만들려고 애쓰던 그는 심장 질환으로 입원한 지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1974년 8월 31일 그의 나이 쉰하나였다.
노먼 커크가 총리를 지낸 기간은 고작 21개월. 뉴질랜드를 바꾸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키위들은 그 짧은 기간을 뜻깊게 기억하고 있다.
서민의 친구였던 노먼 커크는 태어난 고향 마을 와이마테에 묻혔다.
<글_박성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