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는 사람들(11)] 못 말리는 울 엄마

문학의 향기


 

[글쓰는 사람들(11)] 못 말리는 울 엄마

일요시사 0 1097

 <사진 김인식> 

 

 며칠 잠잠하다 했다. 막 잠이 들려는데 요란한 벨 소리가 잠을 깨운다.

 “할머니, 죄송해요. 아이가 울음을 멈추질 않아요. 한밤중이지만 할 수 없이 왔어요”.

 방은 답답하다며 늘 거실에서 잠을 청하는 엄마는 그 순간만큼은 “아이고 다리야 아이고 다리야”하며 노래를 부르는 엄마가 아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일으켜 문을 열어주며 “괜찮아 괜찮아”하며 늦은 밤 문을 두드린 아이 엄마의 미안함을 덜어주며 안심시킨다.

 아이를 받아든 엄마는 어느새 아이와 한 몸이 되어 손놀림이 빨라진다. 여기저기를 만지고 주무르더니 토닥이며 아이를 보며 노래를 부른다. 시간이 지나자 조금 전까지 자지러지며 울던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한 모습으로 쌕쌕거리며 자고 있다.

 엄마는 아파트 단지에서 약손으로 평판이 자자했다. 새벽에는 갓난아이가, 낮에는 할머니들이 단골이다. 그 덕에 우리 집에는 먹거리가 늘 넘쳐났다. 도움을 받은 이웃들은 고맙다며 부침개나 떡과 과일을 가져다주는가 하면 때론 엄마가 애인이라고 말하는 담배도 쏠쏠하니 들어왔다.

 한 달에 한 번은 우리 집이 병원으로 바뀐다. 정식 한의사가 아닌 야매 한의사 할배가 우리 집에 와 치료하는 날이다. 오는 순서대로 거실 바닥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차례로 눕는다. 야매 할배는 순서대로 진맥을 하고 침을 놓고 부항과 뜸을 뜬다. 그럴 때면 엄마와 할배는 전쟁 영화의 야전병원에서 보듯 아무 말 없이 호흡이 척척 잘 맞는 의사와 간호사가 같다.

 엄마는 화장실 두루마리 휴지를 둘둘 말아 부황이 끝난 할배에게 내민다. 그러면 할배는 자연스럽게 휴지를 받아 부황의 흔적인 핏덩어리를 말끔히 닦아낸다. 그사이 엄마는 비닐봉지를 가져와 다음 단계를 기다리는 간호사 할매가 된다. 치료가 끝나고 방문객들이 돌아가고 나면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간호사였던 엄마의 치료 순서다. 할배는 엄마가 타 준 진한 다방 커피를 마시면서 한숨 돌린 후 퉁퉁 부은 엄마 다리의 치료를 위해 대침을 꺼냈다. 야매 할배는 관절염으로 고생하셨던 엄마의 주치의였다.

 내가 자라면서 자주 봐왔던 우리 집 풍경이다. 한밤의 평화를 깨우는 이웃을 마다하지 않고 반갑게 맞이하는 엄마에게 볼멘소리를 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엄마가 의사야? 한밤중에 잠도 못 자게 왜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에 오는데!!”

 내가 이렇게 짜증을 내면 엄마는 이웃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며 날 달래셨다. 엄마의 엄마, 즉 외할머니가 하시던 걸 어릴 때부터 봐왔던 것이 엄마에게로 전수가 된 것이었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에 행여나 방해가 될까 봐 4년 동안 그리도 가고 싶었던 한국에 가지 않았다. 엄마가 보고 싶어도 꾹 참았다. 학교를 오가는 왕복 2시간 거리의 차 안에서도 한국 음악을 거부하며 지냈다. 차 안에서 수업 중 녹음한 강의를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한국말도 아닌 영어로 진행되는 의학 수업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절박한 심정으로 공부에 매달렸다. 뉴질랜드로 이민을 와서 남은 인생을 무엇을 하고 보낼 것인가에 대해 1년을 고민한 뒤 선택한 길이었다. 나 스스로에게도, 이웃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공부하면서 엄마 생각이 나 베개를 적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건 이웃이 도움을 요청하면 마다하지 않던 엄마였다. 비록 의료 자격증은 없었으나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 이웃을 도왔다.

 또 한편으로는 아파트 단지에서 무서운 할머니로 정평이 나 있었다. 아파트 부녀회에서는 달갑지 않은 할머니였다. 소수의 이익보다는 공공의 이득에 늘 앞장을 섰다. 복도에 물소리가 나면 달려나가 청소하는 아주머니를 모셔와 따뜻한 차를 대접하는가 하면 아파트 경비 아저씨들에게도 절기마다 챙기시는 따뜻한 엄마였다.

 내가 자랄 때 기억하는 엄마는 엄했다. 말도 없이 귀가 시간을 넘기거나 잘못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둥 잘못을 하면 늘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럴 때면 매서운 매로 잘못을 선명하게 기억나게 하셨다. 하지만 그런 날이면 잠결에 느껴지는 마사지하는 엄마의 손길은 내 허벅지에 난 멍든 자국만큼이나 마음을 아파한다는 걸 안다.

 

 나는 2010년 뉴질랜드 공인 한의사가 되었다. 내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 시기였다. 중년의 나이에 새로운 도전은 두려움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졸업식 날 맛본 성취감은 달고 달았다. 뉴질랜드에 이민 와서 느낀 최고의 멋진 날이었다. 엄마와 아내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한 지난 4년의 세월을 묵묵히 참고 견디며 격려를 아끼지 않은 가족에게 감사한 날이기도 했다.

 그날 마음 한쪽이 아렸다. 가장 축하를 받고 싶었던 엄마는 천상에 계셨기 때문이다. 밤에 잠을 깨운다며 투정을 부린 막내딸이 엄마처럼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는 모습을 보신다면 울 엄마 어떤 표정을 지으실지 궁금하다.

 아마도 함박웃음 지으시며 엄지손가락을 높이 올리시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서 한 말씀 하시겠지. “내 비닐 봉다리(부산 사투리) 들고 니 옆에서 간호사 해도 되나?”

글_메이

  

‘글쓰는 사람들’은 오클랜드를 중심으로 한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한 달에 두 번 모여 좋은 글을 나누며 글쓰기도 하고 있습니다. 네 명이 번갈아 가며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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