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는 사람들(19) 크루즈의 환상

문학의 향기


 

글쓰는 사람들(19) 크루즈의 환상

일요시사 0 1231

<사진: 김인식> 

 

 

하얀 제복을 입은 선장이 내게 다가와 손을 내민다. 용기를 내어 그의 손을 잡고 무대로 오른다. 그와 나는 춤을 추기 시작한다. 객석과 무대는 캄캄했고 오로지 조명만이 우리를 따라 다니며 비추고 있다. 등허리 선까지 파인 검정 드레스의 곳곳에 박혀 있는 스팽글은 더욱 빛난다. 내 왼손은 선장의 어깨에, 오른손은 마주 잡은 그에게 맡겨두고 스텝에만 집중한다. 혹여나 발을 밟지 않을까 걱정해서이다. 그러나 춤을 기억하는 내 몸을 믿고 맡겨둔다. 언젠가 필요할지도 몰라 배워두었던 춤 실력이 빛을 내는 순간이다. 음악이 끝나고 인사를 마치자 객석에서 환호성과 함께 박수 소리가 여운을 남긴다.

 

5월 한국 방문에 맞춰 인천에서 출발해 일본 오키나와, 아마미, 가고시마, 나가사키를 돌아 부산항에 입항하는 6박 7일 일정의 크루즈를 발견하곤 바로 예약했다. 내 나이 50에 5월생. 나에게 생일선물을 하고 싶었다. 가끔은 혼자서도 여행을 곧잘 하는 편이지만 이번만큼은 각별한 느낌이었다. 한 달 전부터 들뜬 마음으로 크루즈를 위해 준비했다. 드레스코드에 따라 매일 밤 정찬에 입을 드레스와 예비로 두 벌, 그리고 그에 맞는 액세서리까지 신경을 썼다.

 

크루즈 하면 먹거리가 관심사인데 토속적인 음식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한국에서 출발하는 크루즈라 마음이 놓였다. 선상의 대극장에서는 날마다 저녁 공연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다음 기항지에 배는 정박해 있어 편한 복장으로 투어를 나서면 된다. 크루즈의 장점은 가방을 들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한나절 관광 후 집처럼 다시 오른 배에는 쉴 수 있는 스파와 다이어트 걱정만 아니라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식당이 기다리고 있다. 요리 강좌를 비롯한 각종 강좌가 있어 무료할 틈이 없다.

 

얼마나 기다렸던 여행인가. 오클랜드에서 서울까지 가는 10시간이 넘는 비행기 안에서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소풍 가기 전날 아이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시계에만 자꾸 눈이 간다. 63빌딩을 옆으로 눕힌 것보다 더 긴 길이를 자랑하는 크루즈를 처음 본 순간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어마한 크기가 나를 압도했다. 둥근 창을 통해 바다를 볼 수 있는 오션 뷰(ocean view) 방은 자그만 했지만 아늑했다. 다음에는 돈을 벌어 발코니가 있는 방에 머물 상상을 잠시 해본다. 무엇보다 바다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어디에서든 망망대해를 감상할 수 있어 행복했다.

 

그러나 그런 기대와 상상은 얼마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선상의 첫날밤, 갈라쇼라는 선장이 초대하는 파티가 대극장에서 있었다. 오래전부터 준비한 대로 스팽글이 여기저기 장식되어 있는 등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검정 드레스와 그에 어울리는 팔찌와 귀걸이와 구두를 신고 나섰다. 오늘만큼은 나도 할리우드 여배우 못지않다.

 

조금은 이른 시간이었는지 대극장엔 몇몇 사람들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무대 맨 앞줄에 자리하고 앉아 행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무대에 불이 켜지고 뱃고동으로 입항을 축하하는 행사가 시작되었다.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답고 쭉쭉 빵빵인 백인 여인들의 공연과 크루즈 직원들의 인사가 이어졌다.

 

마지막 하이라이트인 하얀 제복의 선장은 무대 인사를 했다. 중년은 넘은 듯 보이는 백인 남자는 어릴 적 보았던 동화책 선장의 모습대로 콧수염이 나 있었다. 영화 <사관과 신사>의 주인공 리처드 기어만큼이나 멋져 보였다. 인사말을 마친 그는 무대 밑으로 내려와 주위를 둘러보더니 내게로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함께 춤추지 않겠느냐고. 요즘 말로 심쿵, 그 자체였다.

 

선장과의 춤을 마지막으로 갈라쇼가 끝났다. 내 환상도 끝났다. 대극장에 불이 환하게 들어왔다. 사람들은 일제히 일어서 나갈 준비를 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내가 꿈에 그리던 그런 관객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한국의 5월은 가정의 달, 그래서인지 효도 관광으로 온 부모님들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드레스코드는 화려한 드레스 대신 한복, 나비넥타이 대신 일반 양복 차림의 어르신들이었다.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고 있는 분들도 눈에 들어왔다. 속으로 되뇐다. 그렇지. 한복도 정장이고 우리 고유의 드레스라고.

그날 이후 난 정장 차림을 요구하는 대극장이나 정찬을 갈 때는 가방을 뒤져 되도록 노출이 적은 옷들만 골라 입었다. 동방예의지국인데 어디에서든 어르신들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불편한 것은 갈라쇼 때 선장과 춤을 춘 것으로 얼굴이 알려져 식사 때면 사람들이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또한 혼자 여행 온 게 그들에게는 신기했는지 반응들은 호불호로 갈렸다.

 

식사시간이 아니면 나는 거의 사람들이 찾지 않는 위층의 선베드에서 시간을 보냈다. 책을 보다 잠이 오면 그대로 잠이 들곤 했다. 오랜 시간 엎드려 잠이 드는 바람에 다리 뒷부분에 가벼운 화상을 입기도 했다. 반바지 차림이라 등 쪽은 피할 수 있었다. 어르신들이 행여나 오가지 않을까 해서 수영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크루즈 여행 전에 계획했던 대로 된 건 하나, 해맞이다. 이른 새벽 일어나 배 난간에 나가 바람과 함께 망망대해에서 떠오르는 해를 본 것은 큰 기쁨이었다. 날씨가 흐려 며칠을 기다려 맞이한 해였다. 눈부시게 붉은 해를 바라보며 또 다른 나의 50년을 설계해본다. 하지만 한국의 5월에는 두 번 다시 크루즈는 가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글_메이

 

 

‘글 쓰는 사람들’은 오클랜드를 중심으로 한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한 달에 두 번 모여 좋은 글을 나누며 글쓰기도 하고 있습니다. 네 명이 번갈아 가며 연재합니다.

 

[이 게시물은 일요시사님에 의해 2018-07-17 20:25:08 교민뉴스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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