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전설 최동원 ´못다 이룬 세 가지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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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전설 최동원 ´못다 이룬 세 가지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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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폼 만큼이나 다이내믹한 인생
해외-부산 롯데-1군감독 꿈 못 이뤄

[데일리안 이일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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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동원만이 구사했던 유일한 투구폼을 안고 그는 영면의 길을 떠났다. ⓒ 연합뉴스

또 하나의 큰 별이 졌다.

지난 7일 고(故) 장효조 삼성 2군 감독 타계에 이어 불과 일주일 만에 최동원 전 한화 2군 감독마저 향년 53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한국프로야구 초창기에 큰 족적을 남긴 두 레전드의 별세는 600만 관중시대를 열고 있는 프로야구계에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다.

장효조와 최동원, 두 레전드는 그야말로 프로야구 초창기 붐을 일으켰던 주역들이다.

장효조는 발군의 타격 재능으로 독보적인 타격 성적을 일구며 신생 프로야구에 바람몰이를 했던 주역이다. 최동원 역시 1984년 7차전까지 가는 한국시리즈에서 무려 3차례나 완투하며 홀로 4승을 따내는 괴력의 철완투를 선보이며 당대 최고투수 반열에 올랐던 영웅이다.

전설 되어 버린 최동원표 투구폼

´최동원 키드´란 말이 생길 정도로 최동원의 인기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경남고-연세대를 거치면서 국가대표팀 에이스 역할을 할 당시 독특한 투구폼은 아직도 선명하게 각인돼 있다. 왼 무릎이 가슴에 닿을 정도의 하이킥, 그 후 하늘로 솟구치는 왼손과 글러브, 반대로 아래로 급격히 내려오는 오른 어깨는 그의 트레이드마크.

게다가 슬라이드 스텝 시 꽈배기를 꼬는듯 다리를 약간 꼬면서 반발력을 극대화하던 퀵 모션도 최동원만이 소화할 수 있는 특유의 투구 모션이었다.

가냘픈 체구에서 몸 전체의 활용도를 극대화해서 뿌려대는 강속구는 그야말로 타자들에겐 속수무책이었다. 여기에 최동원이 구사했던 100km/h대의 아리랑 커브는 강속구를 기다리던 타자들의 타이밍을 보기 좋게 뺐어버렸다.

이제는 그의 투구폼을 볼 수 없게 됐다. 최동원만이 구사했던 유일한 투구폼을 안고 그는 영면의 길을 떠났다. 아리랑 커브는 정민태 등 강속구 후배 투수들에게 계보가 이어졌지만 원조는 떠났다.

84한국시리즈 ´나 홀로 4승´

최동원은 풍운아다.

70년대 아마야구와 80년대 초반 프로야구는 최동원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아마추어 시절은 물론 프로야구 초창기 1984년 한국시리즈까지. 최동원(경남고)-김시진(대구상고, 현 넥센 감독)-김용남(군산상고)과 함께 트로이카 중에서도 에이스였던 그는 1984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 ‘왜 최동원인가’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당시 객관적 전력은 삼성이 한 수 위. 삼성은 껄끄러운 상대 OB(현 두산)를 피하고 롯데에 고의적인 져주기 의혹을 풍기면서도 한국시리즈 파트너로 롯데를 선택했다. 장효조-이만수-정현발-천보성-배대웅 등으로 이어지는 막강 타선을 보유한 삼성이었기에 최동원만 피하면 된다는 계산이 깔린 것.

하지만 그게 오산이었다. 3경기에 출장하리라 예상했던 최동원이 무려 5경기에 등판했다. 삼성으로선 최동원의 벽을 넘지 못하고 시리즈 전적 3-4로 석패했다. 최동원의 롯데가 거함 삼성을 무너뜨린 결과다.

최동원 vs. 선동열 ‘역사적인 투수전’

국보급 투수들이 펼친 최고의 명승부가 1987년 5월 16일 부산 사직구장서 펼쳐졌다. 당대 최고 투수들이 자웅을 펼치는 롯데와 해태의 경기는 프로야구계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됐다. 두 투수의 자존심을 모두 건 빅매치는 2-2 연장 15회 무승부로 결말을 맺었다.

최동원이 15회 완투한 투구수는 209개. 선동열이 완투한 232개를 합하면 무려 441개. 두 선수가 팔이 빠져라 던졌다. 최동원과 선동열의 이름을 건 숙명의 한판 명승부였다. 이 때 던진 441개의 선발투수의 한 경기 투구수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으로 남을 공산이 크다.

장장 4시간 56분 동안 최동원이 선동열과 벌인 15회 완투 경기는 한국프로야구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투수 명승부로 꼽힐 정도다. 이제 최동원은 한국 프로야구사 최고의 명승부를 남기고 하늘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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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못다 이룬 아픔은 한국프로야구계 전체가 책임져야 할 아픔이기에 그의 타계는 애도의 진폭이 클 수밖에 없다. ⓒ 연합뉴스

비운의 전설 최동원 ´못다 이룬 세 가지 꿈´

사실 최동원은 고교를 졸업한 직후 일본프로야구 진출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롯데 오리온스 감독이었던 한국계 가네다 마사이치(한국명 김정일)가 최동원 강속구에 반해 양자로 들여 영입하려 했지만, 최동원 조부의 극심한 반대로 일본야구 진출에 실패, 연세대로 진로를 돌렸다.

최동원이 일본프로야구로 직행했더라면, 최동원의 야구 인생과 한국야구의 역사는 달라졌을 수 있다. 보다 큰 무대에서 일본 타자들을 상대로 자신의 진가를 선보이지 못한 아픔이 최동원에겐 항상 존재했다.

최동원은 또 두 가지 소원을 못 이룬 채 눈을 감았다. 첫 번째 소원은 고향 부산으로 가서 롯데 유니폼을 입어보는 것. 두 번째 소원은 1군 감독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최동원은 두 가지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영면의 길을 떠나고 말았다.

야구선수로는 독특한 캐릭터를 형성했던 금테 안경만큼이나 최동원은 자존심이 강했다. 프로야구 최초로 선수협을 조직하려다 미운털이 박힌 최동원은 징벌성 트레이드로 롯데에서 삼성으로 이적한 뒤 마운드에 설 힘을 잃어버렸다. 강속구를 던지던 최동원은 삼성 유니폼을 입은 뒤 기교파 투수로 전락, 두 시즌만 보낸 뒤 삼성에서 옷을 벗었다.

프로야구 초창기 선수협이 없던 당시엔 트레이드나 구단의 조치는 일방적이고 상명하달식이었다. 선수들이 반기를 들면 트레이드 카드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때다. 그 최초의 희생양이 ´선수협 주동자´ 최동원이었다.

자존심이 누구보다 강했던 최동원은 트레이드 이후 야구를 더 이상 해야할 동력을 상실하고 은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총대를 멘 최동원은 그 후 야구계를 잠시 떠나 정계에 몸담기도 했지만 실패, 뒤늦게 야구계로 복귀해 지도자의 길로 접어들었지만 그땐 건강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던 롯데로 못가고 눈을 감은 전설의 투수 최동원. 그는 고(故) 장효조 2군 감독처럼 1군 감독이 되어 보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 채 하늘로 떠났다. 선수 시절 모든 걸 다 이룬 불세출의 대스타 최동원이었음에도 부산과 1군 감독, 두 가지 꿈은 이루지 못한 채 생을 마쳐 주위의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다이나믹한 투구폼만큼이나 다이나믹한 인생을 산 풍운아 최동원. 그가 못다 이룬 아픔은 한국프로야구계 전체가 책임져야 할 아픔이기에 그의 타계는 애도의 진폭이 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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