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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 마디 합시다

일요시사 2013Mon, 02 Sep 2013 17:27:19 +1000pm95Australia/SydneyMon, 02 Sep 2013 17:27:19 +1000Australia/Sydney02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게 인생이라지만, 별로 산 것 같지도 않은데 어느덧 육십이 내일 모레다. 인생의 속도는 나이에 비례한다고 하더니 갈수록 세월이 무상하게 빨리도 지나간다. 공자는 나이 육십이 되면 천지만물에 통달하고 듣는 대로 모두 이해할 수가 있다고 해서 이순(耳順)이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워낙 깨닫는 게 더뎌서 그런지 나이를 먹을수록 천지만물에 점점 먹통이 돼가고, 들어도 모르는 게 더 많아지는 것 같다. 젊어서는 나름대로 주관도 확실해서 친구들과 삶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목소리 꽤나 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말을 쉽게 하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세상이나 사람을 보는 안목이 펜화에서 수채화로 바뀌었다고 할까, 날카롭게 보기보다는 두리뭉실 이해하려고 한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에서 많은 경우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내 판단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 동안의 삶을 통해서 수도 없이 경험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쉽게 판단을 내리지 않으려는 습관이 생겼다. 특히 사람에 대해서는 말을 아껴야겠다는 생각이다. 물론 아직도 수양이 덜 돼서 안 할 말을 괜히 했나 보다 하고 후회할 때가 적지 않지만 말이다. 이제 이순(耳順)을 눈 앞에 둔 나이인데, 대화를 하다 보면 듣는 대로 이해가 되는 게 아니라,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더 많음은 어찌 된 일일까? 내가 이해력이 떨어진 것일까, 아니면 알쏭달쏭한 말들이 많기 때문일까? 있는 것을 말하는 사람보다는 느껴지는 대로 말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리라. 그러다 보니 농담을 좋아하고, 편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다. 실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고, 말이 썰렁하다는 말도 자주 들었다. 그래도 즐거웠는데, 이런 즐거움도 이제는 쉽지 않게 되었다. 명색이 목사라는 사람이 농담이나 하고 가벼운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게 덕이 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도 목사라면 듣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면서도 알찬 말을 잘 해야 하는데, 왠지 이 것조차 사치로 느껴진다. 나도 언젠가는 말 잘하는 목사가 되리라 스스로 위로해본다. 좋은 말은 보약과 같아서 마음을 기쁘게 하고 삶을 풍요롭게 만들지만, 어떤 말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런데 무심코 쉽게 하는 말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를 종종 본다. 입 안에는 수없이 많은 균들이 득실거린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에도 균이 잔뜩 묻어있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다.” 입에서 나오는 말로 자신의 더러움을 나타낸다는 뜻이다. 그렇다! 우리는 자신이 하는 말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상태를 남들에게 보여주게 된다. 우리는 말을 하면서 옷을 벗는다. 말을 하면서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말을 너무 많이 하다 보면 자신의 가려져 있던 치부를 드러내게 된다. 성경에는 나병 환자가 치유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나병이란 나균이라는 박테리아가 말초신경을 침범해서 감각을 못 느끼게 되는 병이다. 감각이 없으니 어디에 부딪혀도 아픔을 느끼지 못 한다. 또 아픔을 느끼지 못하다 보니 자꾸 부딪히게 되고, 결국은 손발이나 코 등이 뭉그러지게 된다. 신약성경의 마태복음 8장 1~4절에는 나병환자가 깨끗하게 치유 받는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예수께서 산상수훈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실 때 수많은 무리가 따랐다. 그 때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나아와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치유해주실 것을 간청하여 나병에서 깨끗해졌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자신이 깨끗하다고 믿고 있던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 건강하다고 믿고 있었기 에 예수 앞에 엎드려 애원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사실은 수많은 무리야말로 영혼의 감각을 상실한 영적 나병환자였던 것이다. 그들의 영혼이야 말로 나병환자처럼 뒤틀리고 뭉그러져가고 있었지만, 감각도 없고 아픔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감각이 없으니 부끄러움도 없고 아픔도 없다. 부끄러워할 줄 알고 아파할 줄 아는 사람이 치유를 받는다. 부끄러워할 줄 알고 아파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을 볼 줄 아는 사람이다. 자신의 부끄러운 치부를 볼 줄 아는 사람이다. 아픈 자만이 자신의 병을 볼 수 있고, 또 치유를 체험할 수 있다. 나병환자는 몸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감각신경은 마비되었지만, 영혼의 아픔이 있었다. 죄인 취급 당하며 사회에서 격리되어 토굴 등을 돌아다니며 사는 깊은 아픔과 많은 눈물이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무리는 몸은 건강하였을 지 몰라도 그들의 영혼은 마비되어 있었다. 홀아비 마음은 과부가 안다고 아픔과 눈물이 있는 사람은 말을 아낀다. 함부로 돌을 던지지 않는다. 진짜 아픔을 안다면 말이다. 마가복음 2장 17절에서 예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아픈 자가 의사를 찾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병든 자들을 찾아오신 영혼의 의사이시다.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나는 마음과 영혼이 아픈 병자입니다. 나를 치유해주소서” 절규하는 사람들을 부르러 오신 위대한 영혼의 의사이시다. 말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조용히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말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낼 것이 아니다. 이제 이순(耳順)의 나이를 앞두고 말을 아끼며, 자신의 치부를 가리는 법을 배워야 되겠다. 주님, 저를 치유해주소서! 채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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