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등에 올라 탄 이들 “잡을까? 잡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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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등에 올라 탄 이들 “잡을까? 잡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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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 정권 ‘2인자 징크스’ 전쟁 속으로… 
 

‘2인자 잔혹사’ 대선후보까지 올랐다 구속·수감
‘DJ의 복심’ 박지원 권력의 바닥 찍고 제2의 전성기
‘2인자’ 이재오 특임장관 활발한 행보, 징크스 깰까

최고 권력 곁에는 항상 2인자들이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그 자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2인자는 최고 권력자 곁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황태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면 권력무상을 깨닫기도 전에 날아올랐던 것보다도 더 빠르게 추락했다. 하지만 최근 현 정권의 2인자로 꼽히는 이재오 특임장관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복심’이었던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가 활발한 행보를 보이고 있어 ‘2인자 징크스’를 깰 수 있을지 여부에 시선이 모아지고 있다.

세상에 영원히 푸르른 것은 없다. 권력은 특히 그렇다. 권세는 십년을 가기 힘들다는 ‘권불십년’이라는 말은 오랜 시간 증명돼 왔다. 특히 정권의 중심에 섰던 이들은 정권교체와 함께 누구보다도 빠르게 추락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박정희 정권의 차지철 전 경호실장, 전두환 정권의 장세동 전 안기부장, 노태우 정권의 박철언 전 의원, 김영삼 정부의 김현철씨, 김대중 정부의 박지원 의원, 노무현 정부의 이광재·안희정 등 ‘2인자’로 불렸던 이들의 부상과 몰락은 판에 박힌 듯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 곁에서 권력의 단비를 맛봤던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은 5·16 당시 육군 대위로 쿠데타에 참여, 박정희 소장의 경호 장교를 맡으면서 인연을 맺었다.

호가호위 2인자
무소불위 권력 ‘떵떵’

대통령 경호실장에 임명된 그는 단순히 대통령의 신변을 돌보는 차원을 넘어 대통령의 권력을 경호하는 ‘정권의 파수꾼’ 역할을 자임했다. 대통령의 안전을 국정 최우선 순위에 두면서 모든 가치 기준을 여기에 맞춘 것. 때문에 당시 경호실은 ‘대한민국 최강의 군대’라고 불렸다. 그러나 1979년 10월26일에 궁정동 안가 연회장에서 박 전 대통령과 같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저격당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전두환 정권에서는 군대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이래 그의 ‘그림자’로 불린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자타가 공인한 정권의 2인자였다.

전 전 대통령의 12·12쿠데타에 동참, 정권 창출의 일등공신이 된 이후 장 전 안기부장은 전 전 대통령이 집권한 7년 중 5년 동안 군부정권 권력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경호실장과 안기부장을 맡아 대통령의 최측근에 서있었다.

그가 경호실장 시절 생긴 ‘심기경호’라는 말은 전 전 대통령의 안전뿐 아니라 기분까지 챙긴다는 ‘절대적인 충성’을 나타낸다. 이 같은 충성의 대가로 당시 장 전 안기부장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정권의 실세가 될 수 있었다. 전 전 대통령의 밀사로 남북정상회담을 논의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급기야 전 전 대통령의 후계자로까지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퇴임 직후부터 구치소에 드나들기 시작해 1989년 5공 비리사건으로 구속됐다. 권력을 손에 틀어쥔 지 6년 만의 일이다. 이어 1993년 용팔이사건(통일민주당 창당 방해사건), 1995년 5·18 광주민주항쟁 재수사 등으로 3차례 구속과 수감을 반복했다.

하지만 그는 용팔이 사건 등에서 “나 이외에 더 이상의 배후는 없다”고 강조, 전 전 대통령을 끝까지 보호했다. 현재 5공 인사들의 맏형 노릇을 하며 전 전 대통령의 곁을 지키고 있다.

노태우 정권의 ‘떠오르는 태양’은 박철언 전 민자당 의원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고종사촌 처남인 박 전 의원은 대통령 비서관, 안기부장 특별보좌관 등을 지내면서 정권의 핵심에서 움직였으며 대북밀사로 비밀리에 20여 차례 북한을 방문했다.

노 전 대통령이 취임한 후 제13대 국회의원이 된 그는 ‘6공의 황태자’로 불리면서 정무 제1장관, 체육청소년부 장관 등을 지냈다. ‘노태우’라는 바람을 타고 차기 대권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떠오른 정권의 풍운아였다.

하지만 용팔이 사건,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 부산기관장 회식 사건 등 각종 사건에 배후자로 지목 당했다.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으나 ‘슬롯머신 사건’으로 의원직을 상실하고 1년6개월간 복역했다. 다시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나 1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낙선하면서 정계를 은퇴했다.

김영삼 정권의 2인자는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다. ‘소통령’으로 불리며 각종 공직인사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권세를 누리던 그는 국정개입 및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아버지’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1997년 5월 구속됐다.

한보그룹 특혜비리 수사 때 두양그룹 등 기업체로부터 이권 청탁과 함께 활동비 등의 명목으로 66억원을 받고 증여세 14억원을 포탈한 혐의가 드러나 징역 2년형을 선고받은 것. 그는 1992년 대선 때 쓰고 남은 비자금 186억원을 관리하기도 했다.

현철씨와 검찰의 악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004년 총선을 앞두고 한솔그룹 조동만 전 부회장으로부터 20억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두 번째 구속된 것. 정치에 대한 뜻을 버리지 못한 현철씨는 지난 18대 총선 때 한나라당 공천을 신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현재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으로 활동하며 정계 복귀를 노리고 있다.

YS의 정치적 아들이자 ‘역사상 가장 센 여당 사무총장’으로 불렸던 강삼재 전 의원도 정권교체 후 2인자들의 전철을 피해가지 못했다. 그는 ‘안풍(安風)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2001년 국고손실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이후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긴 했지만 국가로부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당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복심’은 박지원 전 장관이었다. DJ의 비서로 정계에 발을 들인 그는 DJ가 정권을 잡자 청와대에 들어가 공보수석을 맡았으며 문화관광부장관, 정책수석, 비서실장 등으로 정권이 끝날 때까지 지근거리에서 DJ를 보좌했다.

특히 그는 DJ의 대북특사로 북측과 접촉,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정상회담의 대가로 대북송금 의혹이 일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북송금 특검을 수용하면서 동교동계 인사들과 함께 서울구치소로 향해야 했다. 정몽헌 전 현대아산 회장에게서 받았다는 150억원과 관련, 무죄를 선고 받고 18대 총선을 통해 정계로 복귀했다.

박 의원의 사정도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에 비하면 나은 편이다. 동교동계의 맏형 격인 권 전 고문은 한보·현대그룹으로부터 각각 불법정치자금과 비자금을 수수한 혐의로 김대중 정권 전후 세 차례에 걸쳐 구속됐다. 그는 DJ가 정계에 입문할 때부터 참모역할로 그의 곁에 있기 시작해 40여 년간 측근에서 보좌했으나 거듭된 구속으로 정권의 햇살을 누려보지 못한 ‘비운의 2인자’로 꼽힌다.

연이은 구속으로 ‘잔혹사’의 역사 써

노무현 전 대통령에겐 특별한 2인자가 없었다. 참여정부 당시 청와대 관계자들은 “참여정부에 2인자는 없다. 2인자 문화는 제왕적 대통령 시대의 문화”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통령 당선 일등공신으로 꼽히는 이들은 있다. ‘좌희정 우광재’다.

‘박연차 게이트’ 등으로 참여정부 인사들에게 검풍이 불어 닥치면서 이들도 서초동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돌리지 못했다.

이처럼 대부분의 2인자들은 정권이 살아있을 때는 따뜻한 봄볕을 쬐지만 최고 권력자가 바뀌면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게 된다. ‘더 높은 곳’을 향한 야망도 좌절되기 십상이다. 몇몇만 정계 복귀에 성공했을 뿐 대부분은 ‘과거의 영광’을 안고 쓸쓸히 돌아서야 했다.

하지만 최근 2인자들의 ‘잔혹사의 역사’에 반란이 일어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좌희정 우광재’가 첫 번째 주인공이다. 이들은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각각 충남도지사, 강원도지사 자리를 꿰차면서 지방권력의 세대교체를 이룬 차세대 정치인으로 꼽히고 있다.

‘DJ의 복심’ 박지원 의원의 활약상도 대단하다. 박 의원은 지난 18대 총선에서 이희호 여사 등의 지원을 발판삼아 여의도 정계로 복귀한 뒤 민주당 정책위의장을 거쳐 원내대표로 선출되는 등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특히 민주당이 지난 7월 재보선에서 패배, 비상대책위 체제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사실상 당의 ‘1인자’가 돼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이에 일각에서는 난항을 겪은 차기 국무총리 인선과 관련해 ‘박지원 총리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또한 몇몇 정가 인사들은 “박 원내대표가 국민의 정부 실세로 있으면서 쌓은 인맥과 정보력 등 녹록찮은 정치내공을 바탕으로 하루하루 민주당 내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면서 “차기 대선과 관련, ‘킹메이커’로서 주목받고 있지만 차차기 대선까지 고려하면 직접 뛸 가능성도 있지 않겠냐”는 전망까지 하고 있다.

이재오 특임장관은 그런 박 원내대표로부터 인정받은 현 정권의 2인자다. 지난 대선기간 ‘야전사령관’으로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를 진두지휘했던 이 장관은 국민권익위원장을 거쳐 7월 재보선을 통해 정계 복귀를 한 후 특임장관으로 임명됐다.

최근 “MB정부에는 대통령과 정부를 위해 몸을 던지려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꼬집어왔던 박 원내대표로부터 “이 장관은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며 이 대통령에 대한 충심을 인정받기도 했다.

이 같은 전 정권 2인자의 인정은 이 장관이 김태호 전 총리 후보자가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치며 거센 사퇴 압박을 받게 되었을 때 박 원내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물러날 테니 대신 김태호를 살려 달라”고 말하면서 이뤄졌다.
박 원내대표는 “총리 문제에서는 절대 양보하지 못한다”며 단호히 잘라냈으나 “말로라도 이 장관처럼 처신하는 사람이 정권에 한 명쯤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잠깐의 권세, 긴 고난

전·현 2인자들 징크스 깰까

박 원내대표와 이 장관은 정치적으로 상당히 닮아있기도 하다. 이들은 모두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으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는 점이 그렇다. 정치적 시련을 극복해온 과정도 비슷하다. 박 원내대표는 대북송금건으로 옥고를 치렀지만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정치적 생명력을 얻었다. 이후 무소속으로 18대 총선에 출마, 지역민들의 선택을 받았다. 이 의원은 18대 총선에서 낙마했으나 지난 7월 재보선에서 ‘자전거 유세’로 골목골목을 찾은 끝에 여의도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불가근불가원’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전·현 정권의 2인자라는 ‘닮은꼴 정치인’이지만 박 원내대표는 현 정권의 저격수를 자처하고 있고, 이 장관은 현 정권의 수호자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권은 “이 장관이 역대 권력의 2인자들이 간 길을 되밟는다면 ‘살아있는 권력’이 뒤안길로 사라지는 대로 사고가 날 것”이라면서도 “정권의 2인자들 중 활발한 정치행보를 보이는 이들이 늘고 있는 만큼 2인자들의 징크스도 조만간 깨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장미란 (pressmr@ilyosisa.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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