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05); “그러나”에 담긴 소망

교민뉴스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05); “그러나”에 담긴 소망 <창세기 6:5~14>

우리가 지난 주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 에녹에 대해서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에녹은 일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에녹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기쁨이 되었는지, 하나님께서는 에녹으로 하여금 죽음을 보지 않고 그냥 데려가셨습니다.

 

 이어서 6장에 들어오니까, 세상에 사람들이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세상이 바뀐겁니다. 세상에 사람들이 번성하기 시작하면서 금새 나타나는 것이 사람들이 자기 눈에 좋아보이는 것을 따라가기 시작합니다. 자기 욕심을 따라, 자기 생각을 따라, 자기 마음대로 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따라 살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할 수도 없는 육신이 되고 맙니다. 육적인 존재. 하나님의 영이 아닌 육적인 욕망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자 오늘 본문 5절처럼 사람의 생각하는 것, 계획하는 것, 그 마음에 품은 모든 것은 악한 것 뿐인 거예요.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근심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이 세상을 바라보시면 기뻐하실까요? 근심하실까요? 지금 세상에 죄악이 가득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실까요? 우리도 믿는 자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보다, 하나님의 근심이 될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실까요? 이에 대한 답이 오늘 8절에 나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세상에는 죄악이 가득합니다. 인간은 육적인 욕심에 사로잡혀 그 생각과 계획이 악할 뿐입니다. 지금 이 시대를 바라볼 때에, 마치 오늘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근심과 한탄의 소리가 들릴만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그러나에 담긴 소망”을 나의 것으로 직접 체험하기 위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오늘은 세 가지 질문을 드리고, 그에 대한 답을 찾아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나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저들이 하나님을 몰랐을까요?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던 에녹이 살던 때로부터 불과 4대가 지나갔을 뿐입니다. 그런데 저들의 눈에는 더 이상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저들의 시선을 빼앗은 것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던 시선이, 이제는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던 걸음이, 이제는 자기를 즐겁게 하는 것들과 동행하는 걸음이 됩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던 삶이 하나님의 근심과 한탄이 되고 맙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내 시선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나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세상을 향한 정죄의 시선에서 돌이켜 나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의 심령에, 나의 삶에, 세상의 죄악된 것이 묻어 있지는 않은지 먼저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른 이들을 향한 정죄로만 향하고 있는 나의 시선을 돌려, 나 자신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과연 세상에 가득찬 죄악의 현실 속에서 얼마나 정결함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이 앞에 십자가를 보십시오. 여러분! 새벽에, 또는 금요은혜의 밤에 어두운 곳에 앉아서 조용히 불켜진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가만히 묵상해보십시오. 그러면 십자가 안에 예수님이 비쳐집니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피 흘림, 고난의 흔적이 비쳐집니다. 좀 더 가만히 묵상하다보면, 십자가를 더 깊이 바라보다보면, 이제 십자가에서 나의 모습이 비쳐집니다. 나의 내면이 비쳐집니다. 내 속에 있는 욕심, 탐욕, 죄악됨이 비쳐집니다. 이게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죄 사함에 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능력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능력은 일차적으로 내 속을 비주는 것입니다. 내 죄를 드러나게 합니다. 내 죄를 고백하게 합니다. 처음에는 나의 죄가 깨달아져 나를 아프게 하지만, 그 속에서 자유를 얻게 됩니다. 

 

나의 시선이 십자가를 향해야 합니다. 나의 시선이 십자가에 비친 나 자신을 먼저 향해야 합니다. 죄악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정말 먼저 해결되어야 할 것은 나의 죄의 문제입니다.  “나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 속에서 나의 죄를 바라보고, 그 속에서 나를 위해 보혈을 흘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믿는다.” 십자가 죄사함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 질문입니다. “나는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가는가?” 


죄악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한탄하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상의 패역함을 계속 드러냅니다. 11절과 12절에 세 번씩이나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부패하였다.” 부패, 썩었다는 겁니다. 더럽혀진 것은 씻어서 사용할 수 있지만, 썩은 것은 폐기처분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13절 후반부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14절에 노아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리시죠.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라.”  왜 하나님께서는 죄악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노아에게만큼은 구원의 소망을 보여주시는 것일까요? 본문 9절에 말씀합니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지난 주에 에녹을 통해 본 말씀과 동일한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는 의인이었기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노아는 완전한 자이기에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그리고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였기에,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서, 완전한 자로서 인정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그에게 방주를 만들 사명을 허락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겁니다. 8절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의 전에서 예배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갑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로 사는 인생입니다. 세상에는 죄악이 가득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과 땅은 다 부패하였습니다. 사람들의 포악함은 하나님의 마음을 한탄하게 만듭니다. 근심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다른가요? 십자가를 바라보면 내 죄가 떠오릅니다. 나의 연약함이 떠오릅니다. 언제나 새롭게 결단하며 주의 뜻을 따르고자 하지만, 또 다시 세상에 묶인 채로 살아가는 죄악된 모습입니다. “그러나” 은혜로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질문입니다. “나에게 방주가 준비되었는가?” 


노아는 방주를 만듭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무려 120년동안 방주를 만듭니다. 지금 노아의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그가 산 위에 올라가서 방주를 만듭니다.  히브리서 11장 7절에 보면, 그 모습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 방주를 짓는데,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라고 말씀합니다. 대충 했다는 게 아닙니다. “경외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방주를 준비합니다. 예배 드리는 것도, 그냥 대충 와서 앉아 있다가 간다는 차원이 아닌 겁니다. 경외함으로, 진실함으로, 신실함으로, 신령과 진정을 다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만나서 교제하는 겁니다. 

 

 아직 보이지 않는 일, 겪어 보지도 못한 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무슨 뜻인지 깨달을 수 없는 그 일입니다. 지금 하고 있으면서도 무슨 일인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였기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합니다. 그런데 이게 결국은 하나님이 아닌 노아 자신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본문 14절에 말씀하잖아요.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라.” 그리고 정말 방주를 통해 자신의 생명이, 자기 가족들의 생명이 구원을 받게 되고 믿음의 상속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나에게는 방주가 준비되어 있습니까?” 오늘 노아는 열심을 다해 수고하여, 120년을 수고하여, 세상의 조롱과 무시를 견뎌내며 자신을 위해 방주를 준비하였습니다. 하지만 참으로 감사한 것은 나를 위한 방주는 내 힘과 노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과 고난으로 준비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준비하신 구원의 방주, 십자가입니다.  세상의 조롱과 멸시는 예수님께서 다 당하셨습니다. 그 참혹한 고통과 고난의 걸음은 예수님께서 다 걸으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는 다만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준비하신 나의 구원의 방주, 십자가에 오르기만 하면 됩니다. 이 사순절 기간,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에 감사함으로, 더욱 더 십자가를 붙잡고 주님과 동행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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