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11) 부활의 주님을 만났으면 나도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교민뉴스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11) 부활의 주님을 만났으면 나도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마태복음 28:1~10>

할렐루야! 부활의 이 아침에 예배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 부활의 기쁨과 감사와 감격이 넘쳐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부활의 주님을 만났으면 나도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입니다.

  

얼마 전에 교회 봉고차 워프를 받으러 갔는데, 통과가 안되었습니다. 뒷 범퍼 쪽에 작은 문제가 있어서 통과가 안됩니다. 운행하는데 전혀 지장은 없지만, 워프는 통과가 안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리를 해서 워프를 받았습니다. 그걸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내 신앙의 삶에도 중간에 워프를 한 번씩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신앙도 교회는 잘 다니는데, 믿음생활은 잘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성경보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것은 그냥 다 하고 있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통과” 할만큼 지금 신앙의 삶을 잘 걸어가고 있는가?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강단에 이렇게 십자가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십자가를 바라보면 어떠신가요? “십자가를 바라보는데 아무런 감동이 없다?” 믿음의 삶에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이런 무감각입니다. 사순절을 지내는데, 고난주간, 성금요일을 지내면서도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무감각하다. 부활주일을 맞이해도 그냥 평소와 다름 없이 그저 52주 중에 한 주일 뿐이다. 영적인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왜 자동차 오래타면 엔진보링한다고 하죠. 우리의 영적 엔진도 보링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 정말 간절히 바라기는, 우리 안에 예수 부활의 기쁨이 충만한 시간되시길 축원합니다. 혹 지금 방금 전까지 감동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지금부터라도 영적 에너지를 집어 넣으셔야 합니다. 죽어가는 환자에게 심폐소생술해서 강제로 심장이 뛰게 하잖아요. 오늘 예배하는 이 시간 말씀으로, 기도로, 찬송으로 내 안에 영적 에너지를 깨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부활의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하십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으면, 나도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자로서 살아있는 삶이 무엇인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지나가는 것에 묶이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첫 문장이 마음 깊이 파고듭니다.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안식일이 지나갑니다. 어둠의 밤이 지나갑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머물러 계셨던 그 시간이 지나갑니다. 그리고 안식 후 첫날 새벽이 밝아옵니다.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소망의 말씀이 됩니다. 어둠과 죽음의 시간이 지나 광명의 새 아침이 밝아오는 거예요. 그전까지는 안식일에 하나님께 예배하였는데, 이제는 안식일이 지나 주일에 주님을 예배하게 됩니다.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예수님께서 다시 사신 그 날, 안식 후 첫날 새로운 부활의 아침에 주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부활의 주님을 만나려면,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려면, 십자가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무덤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본문 6절을 보십시오.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합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이어서 7절 중반절입니다.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무덤에 머물러서는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죽은 자의 자리에 서서는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산 자의 자리에 가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10절 마지막에 예수님께서도 직접 말씀하십니다. “거기서 나를 보리라.” 안식일, 무덤의 자리, 어둠과 사망의 자리, 이미 지나간 그 자리에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심으로 생명의 자리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님 말씀하신 그대로 길이 되셨고, 진리가 되셨고, 생명이 되셨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죽음의 자리, 무덤의 자리, 세상의 썩어질 것을 붙잡는 자리에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지나가는 것에 묶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소망으로 내일을 바라보는 자입니다. 죽음의 자리, 무덤을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 빈 무덤, 생명을 바라보는 자입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 빛의 자리를 바라보고, 부활의 소망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바른 갈망의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제가 갈망이라고 표현을 했지만, 쉽게 말하면 바른 것을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찾을만한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할만한 것을 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른 소원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갈망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드디어 안식일을 지내고 여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1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뭘 보러 갔습니까? 예수님을 보러 간 것이 아니라, 무덤을 보러 갔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장례 치르면 삼우제라는 걸 하죠. 장례 치른지 삼일만에 가서 제사를 지내는데, 삼우제의 목적은 무덤이 잘 되었냐를 보러가는 것입니다. 

  

오늘 똑같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보러 갔습니다. 이어서 5절에 천사를 만나는데, 천사가 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여인들이 찾는 사람이 누구라고요? 1절과 5절을 연이어 보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당하고 무덤에 갇힌 예수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하지만 6절에 말씀합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무덤을 찾지 말라는 거예요. 무덤에 갇힌 예수님을 찾지 말라는 거예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찾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의 걸음 속에서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게 바른 갈망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임 당하셨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무덤에 머물지 않고 살아나셨습니다. 더 이상 죽은 자들의 자리에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자리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여인들은 무덤을 보려고 했습니다. 물론 저들의 앞서 무덤을 찾는 자세가 없었다면, 죽임 당하신 예수님이라도 찾아가고자 하는 갈망이 없었다면,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과 처음으로 마주하는 일은 없었겠죠.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향한 갈망입니다. 영적인 갈망, 영원함을 위한 갈망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은 예수님을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 지시고 죽으실 뿐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 빈 무덤의 영광을 보이신 예수님을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애통과 슬픔의 자리가 아닌 기쁨과 소망의 자리를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그 안에서 부활의 주님과 함께 다시 살아나는 영광의 역사에 참여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예수 안에서의 참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으면, 나도 부활의 주님과 함께 다시 살아났으면, 내 안에 하나님 주시는 참된 평강이 넘쳐나야 합니다. 9절에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기서 평안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는 “카이레테”입니다. 이 말은 “평안하라.”는 뜻도 있지만, 또 하나는 “기뻐하라.”는 뜻도 지니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으심과 다시사심을 예고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기서의 기쁨이 오늘 평안이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도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으심을 예고하시는 장면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참 평안을 말씀합니다. 

  

지금 여인들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시는 모습, 열 네 번이나 쓰러지시면서 채찍을 맞았던 모습, 군병들과 사람들에게 조롱 받았던 모습들, 예수님의 그 고통의 걸음을 다 지켜본 여인들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오늘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 이제는 좀 진정이 되었을까요? 여전히 힘든 마음이겠죠. 무덤 속의 예수님을 보러 가면서 마음으로는 몇 번이고, 차라리 가지 말까? 애써 외면하려는 마음을 가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적잖은 마음의 부담, 짓눌리는 마음으로 걸음을 옮긴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의 광경을 보게 되죠. 천사들을 만나고,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게 됩니다. 지금 여인들의 마음이 어떨까요? 기쁠까요? 아니죠. 지금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런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꿈인가 생시인가? 뭐가 어떻게 된건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불안정의 상태입니다. 그저 천사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니까, 제자들을 향해 달려갑니다. 일단 제자들을 만나서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이야기를 하고자 했을 겁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저들의 앞에 서서 말씀하시는거예요. “평안하냐?” 그 안에 담겨진 속 깊은 의미는 “진정해라. 안심해라. 평정심을 찾아라. 너무 놀라거나 무서워하지 말고, 이제 마음껏 기뻐해도 된다.” 평안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에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두려움 가운데 있는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저들을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하신 첫마디가 무엇인가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은 믿는 자에게 참 평안을 주십니다. 사망 권세와 죽음의 두려움 가운데 있는 자에게 참 기쁨을 주십니다. 세상 그 어디를 가도 평안의 소식이 없습니다. 한국의 정치 뉴스를 보면 평안하시던가요? 경제적인 상황을 보면 평안하신가요? 전세계 코로나의 상황, 백신의 접종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우리 대한민국도 그렇고, 세계적으로 그렇고 재확산 소식이 들려옵니다. 평안이 없어요. 저기 미얀마의 소식을 보면 평안이 없습니다. 저랑 아주 친한 친구가 지금 미얀마에 있는데, 참 걱정스럽습니다. 온통 둘러보아도 평안의 소식이 없습니다. 참 평안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만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으면, 그 안에서 참 평안을 누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 여러분! 오늘 부활주일입니다. 부활주일, 우리 안에 감사와 감격과 감동이 넘쳐나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우리 안에 뜨거운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내가 만났으면, 나도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내 잠자던 신앙이 깨어나야 합니다. 잠자던 열정이 다시 깨어나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 주님과 함께 다시 살아난 자로서의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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