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40); 격(格)이 다른 삶 (1)좁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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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40); 격(格)이 다른 삶 (1)좁은 문; <마태복음 7:13~14>

제목에도 격이라는 단어에 한자를 넣어드렸습니다. 이 한자는 “격식” 또는 “바로잡다.”라는 뜻을 지닌 글자입니다. “격”자는 “나무 목” 변에 “각각 각”자가 더해져서 만들어진 한자입니다. 그래서 본래의 의미는 가지치기 한 나무, 그러니까 잘 다듬어진 나무를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입니다. 그러다가 후에는 나무의 가지를 다듬어 모양을 바로잡는다는 뜻이 좀 더 확대되어, “바로잡다.”, “고치다”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고, 지금에 이르러서 “격”자는 가지치기를 잘 한 나무처럼, 잘 다듬어진 사람의 인성이나 인격을 뜻하는 말로 사용됩니다. 

  

산상수훈에는 삶의 여러 가지 행동지침과 같은 실제적인 가르침의 말씀이 나오는데, 그 모든 말씀의 중심주제는 한 마디로 “천국 백성의 삶”입니다. 우리는 땅을 밟고 살아가지만, 땅에 속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다면, 뭔가 차원이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게 바로 ‘격이 다른 삶’입니다.  

  

그 중에 오늘 첫 번째 주제가 ‘좁은 문’입니다. 예수님은 문에 대한 설명을 주시기 전에 먼저 분명하게 선언하십니다. 명령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뒤에 나오는 것은 좁은 문으로 가야하는 당위성을 설명해주시는 것 뿐입니다. 천국 백성의 삶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입니다. 격이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방향성을 세운 자로서 어떠한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뭔가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제 살아온 것처럼 오늘도 살아가면 내일은 똑같습니다. 남들 살아가는 그 모습 그대로 나도 그렇게 살아가면 다 똑같습니다. 격이 다른 삶이라는 것은 뭔가 다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은 뭔가 다르게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성장과 성숙을 위한 권고의 메시지입니다. “지금까지도 열심히 살아왔지만, 그동안 참 수고도 많았지만, 이제 한단계 좀 더 성장할 때가 되었으니, 한 걸음 더 올라서라.” 이런 영적 권면의 말씀으로 받으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 격이 다른 삶을 만들어가는 것, 어제와는 뭔가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 이 모든 변화는 지금 이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좁은 문과 넓은 문을 넘나드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늘 새로운 변화와 성장을 소망하면서도 여전히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성장이 멈춰버린 삶 속에 거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뭔가 다른 삶을 살아가라. 이제 더 성장하라.” 

  

주의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여 정말 뭔가 다른 삶, 어제와는 다른 오늘, 오늘보다 더 성장하는 내일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길이 험하다고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요즘은 코로나로 인해서 사람들의 활동 자체가 달라지긴 했지만, 본래 사람들의 심리는 대부분 많은 사람이 가는 곳으로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때로 물건을 사는데 내가 처음이거나, 식당을 가는데 후기가 하나도 없거나, 그러면 조금 불안하고 선뜻 도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신있게 도전했다가 역시나 그렇지 실망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가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4절에 말씀하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좁은 문으로 딱 들어갔는데, 역시 길도 좁고 협착합니다. “협착”이라는 단어 안에는 내적인 괴로움과 외적인 괴로움이 다 포함됩니다. 한마디로, 아주 힘들고 어렵고 답답한, 앞이 캄캄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리는 사실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순종하면, 모든 것이 다 만사형통해야 할텐데, 왜 이런 협착의 상황을 만나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14절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좁고 길이 협착하지만, 그 길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합니까? 생명으로 인도한다고 말씀합니다.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믿음의 길을 걸어갈 때에, 신앙인으로 살아갈 때에, 길이 험하다고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좁은 문은 힘든 길이다. 들어가면 어려움도 있을 것이다. 나를 따라오는 길은 쉽지 않는 길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명하심은, 그 길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그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도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지만, 부활의 새아침을 맞이한 것처럼, 우리도 주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때에, 세상을 이겨 승리케 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길이 험하다고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성령께서 나의 손을 붙드시고 보호해주실 줄 믿습니다. 그 길이 나의 걸음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주시는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세상을 이겨 승리하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 걷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이 길의 끝을 바라봐야 합니다.  


교차로는 오래 머물 수 없고, 반드시 어느 한 방향을 선택해서 발 길을 옮겨야 합니다. 우회전을 하든, 좌회전을 하든, 아니면 직진을 하든, 반드시 한 방향을 선택해서 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할까요? 어느 길이 좋은 길일까요? 간단합니다. 목적지로 향하는 길이 바른 길이요, 좋은 길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 절의 짧은 말씀이지만, 좁은 문과 넓은 문을 통과했을 때에 펼쳐질 좁은 길과 넓은 길을 아주 명료하게 비교해서 말씀합니다. 좁은 문을 통과하면 좁고 협착한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은 찾는 자도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그 길의 끝은 생명이라고 말씀합니다. 반대로 넓은 문을 통과하면 넓고 평탄한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그 길은 찾는 사람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 길의 끝은 멸망이라고 말씀합니다. 어느 길을 가야합니까? 어느 길이 좋은 길입니까? 아무리 넓은 길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좋아 보이는 길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사람들이 많이 찾는 길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모든 것이 다 좋다고 할지라도, 그 끝이 멸망이라면 절대로 그 길로 가면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 길의 끝에 무엇을 만나느냐는 것입니다. 이 길이 끝나는 그 지점에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4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바울이 그렇게 생명을 다해 험한 길을 감당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의 영적인 시선에 있었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내 삶의 끝에 주어질 하늘의 상급을 바라봤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길의 끝을 바라봐야 합니다. 좁은 길, 험한 길,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길의 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좁은 문,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라.” 예수님의 말씀 따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 생명의 길을 걷는, 격이 다른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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