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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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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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조림 식품 만들어 음식문화 혁명 불러일으켜 


공장 3분의 2가 불에 타 쑥대밭으로 변했다. 

주문이 폭주하던 때라 제임스 와티는 물론 직원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50시간이 채 안돼 생산 설비가 다시 세워졌다. 

제임스 와티를 도우려는 해스팅스 주민들의 한마음이 

이틀 사이의 기적을 일으켰다.



‘무엇을 어떻게 먹고살까?’하는 문제는 인류가 오랫동안 고민해온 숙제 가운데 하나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야생 과일을 따먹거나 들짐승을 잡아먹던 원시사회에서는 ‘자연의 법칙’에 적응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무엇을’ 먹을까 하는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했다.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공으로 만든 식품이 점점 많아졌다. 하지만 ‘어떻게’ 먹을까 하는 문제는 한 세기 전만 해도 ‘해결해야 할 숙제’로 남아 있었다. 아무리 먹을 것이 많아도 보관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비상 식품이라고 할 수 있는 깡통 식품의 제조방식을 대량 생산체제로 바꿔 서민의 먹고사는 불안을 해결해 준 사람이 있다.

 

초등학교 졸업 뒤 직업 전선으로

 제임스 와티는 1902년 3월 23일 캔터베리(Canterbury, 크라이스트처치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양과 소를 치는, 그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몇 해 뒤 제임스는 부모를 따라 넬슨(Nelson, 남섬 북쪽 끝에 있는 작은 도시)을 거쳐 말보로로 이사했다. 블레넘초등학교에 들어가 무지갯빛 내일을 꿈꾸며 열심히 공부했다. 일주일에 두 번 우유를 배달해 5실링(그때는 영국 화폐를 썼음)을 벌었다. 가난한 부모를 위해 어린 제임스가 할 수 있는 경제활동이었다.


 제임스 와티 가족은 집을 북섬 해스팅스(Hastings, 북섬 혹스 베이에 있는 도시)로 옮겼다. 살림이 조금 나아져 ‘제임스가(家)’ 이름으로 땅을 사고 온 식구가 한마음이 되어 낙농업에 뛰어들었다.


 제임스 와티는 초등학교 졸업 학력이 전부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진학을 포기하고 당장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공부는 앞날을 보장받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한 듯하다.

 

일자리는 사방에 널려 있었다. 10대 초반 어린아이가 처음 잡은 일은 과일 가게 점원이었다. 주인 심부름을 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 몇 달 사회경험을 쌓은 제임스 와티는 우체국에 취직해 전신(Telegraph) 주고받는 일을 맡았지만 오래 하지는 못했다. 백내장으로 보직이 바뀌어 큰 우편물을 포장하는 부서로 옮겨야했다. 자존심이 상한 제임스 와티는 일을 그만뒀다. 평생 일터라고 생각하고 들어간 우체국에서 첫 번째 ‘삶의 쓴맛’을 경험했다. 



부엌에서 호롱불 켜놓고 공부해 

 1916년 제임스 와티는 육가공 회사에 들어갔다. 그즈음 5년짜리 회계학 통신교육을 시작해 일이 끝나면 집에 돌아와 부엌에서 호롱불을 켜놓고 공부했다. 그렇게 향학열을 불태워 나갔다.


 4년 뒤 제임스는 그 회사 부 회계사 자리에 올랐다. 거기서 4년을 더 일하다가 한 백화점으로 옮겨 회계 부서를 맡았다. 하지만 백화점 일이 싫증이 났는지 과일 재배자들이 모여 만든 회사에 문을 두드렸다. 그의 삶을 바꾼 전업이었다. 


 제임스 와티는 이 회사에서 몇 살 어린 해럴드 카(Harold Carr)라는 회계사를 만나게 된다. 해럴드는 그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해스팅스 과일 재배자들이 초과생산으로 과일이 남아돌아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얘기를 들은 제임스는 순간 번쩍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버려지는 과일을 잘만 활용하면 부자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해럴드 카와 새 도전에 나서기로 의기투합했다. 제임스는 이곳저곳에서 가공식품 정보를 얻는 한편 유지들에게 부탁해 이틀 만에 투자금 1,250파운드를 모았다. 


 얼마 뒤 혹스 베이(Hawke’s Bay, 북섬 남서쪽 지역)에 있는 한 농지를 빌려 생산 설비를 설치하고 과육 통조림(복숭아 배) 생산에 돌입했다. 그가 만든 통조림이 오클랜드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사업은 곧 제 틀을 잡았다. 창립 첫해 순수익이 892파운드에 이르렀다.

 

뉴질랜드 사회에서 혁신적인 사업 가운데 하나였던 통조림 가공사업은 계속 번창해 나갔다. 제임스 와티는 호주 영국 미국 같은 선진국의 기술을 습득해 현장에 적용했다. 기술 투자와 첨단 설비 도입에 인색하지 않겠다는 게 그의 사업 방침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통조림 수요는 급격히 늘어났다. 뉴질랜드 군대는 물론 영국 미국 군대에서도 그의 통조림 제품은 인기 있는 비상식량이었다. ‘메이드 인 뉴질랜드’(Made in New Zealand)라는 문구가 찍힌 통조림이 선진국 국민들의 입맛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지역 사회서 ‘전설 같은’ 존재로

 해스팅스 경제가 제임스 와티의 회사에 의해 상당 부분 유지됐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수천 명에 이르는 주민이 그가 세운 회사에 취직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했다. 제임스 와티는 해스팅스에서 ‘전설 같은’ 존재였다.

 

그가 돈만 많이 버는 큰 회사 대표로만 머물렀다면 얘기는 달랐을 것이다. 그저 ‘아이디어 하나로 돈을 번 기업인’으로 역사책 한쪽에 남았을 지도 모른다. 제임스 와티가 ‘전설 같은’ 존재로 평가받은 이유는 인간성에 있다.


 붙임성 있는 성격으로 직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제임스는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친구처럼 식구처럼 대했다. 때로는 호된 질책을 하기도 했지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애정 어린 관심이라는 걸 직원들도 잘 알았다.

 

제임스 와티의 참모습은 1962년 2월 19일 일어난 화재 사건에서 잘 알 수 있다. 화재로 공장 3분의 2가 불에 타 쑥대밭으로 변했다. 주문이 폭주하던 때라 제임스 와티는 물론 직원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50시간이 채 안돼 생산 설비가 다시 세워졌다. 제임스 와티를 도우려는 해스팅스 주민들의 한마음이 이틀 사이의 기적을 일으켰다. 

 

제임스 와티는 아들 둘(고든 Gordon, 레이 Ray)에게 사업을 전수해 주었다. 둘을 불러 완두콩을 따게 하고 깡통 상자에 못 박는 일도 시켰다. 공장 바닥에 아들을 앉혀 놓고 경영 비결을 말해 주었으며, 실험실에 데려가 어떤 공정을 거쳐 완제품이 나오는지 상세히 알려주었다. 그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한 시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은퇴 뒤 낚시하며 소박한 삶 즐겨

 제임스 와티는 후계자인 아들들에게 “어떤 회사도 우리 회사를 넘볼 수 없도록 강하게 키워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또 수출 시장의 경쟁력을 늘리는데 큰 비중을 두라고 부탁했다.

 

그는 동종 회사 세 곳을 인수합병했다. 나아가 호주로 영국으로 사업 영역을 넓혀 이익을 늘렸다. 더러 제임스 와티 회사를 독과점 회사로 몰아붙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국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수익을 직원과 지역 사회에 돌려준 훌륭한 기업으로 여겼다.

 

여느 사업가와는 다르게 제임스 와티는 시골 한적한 곳에 있는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정원 돌보는 일을 즐겼으며, 시간이 나는 대로 타우포 호수에서 낚시를 하거나 우표 수집을 하며 인생 후반전을 보냈다. 사업 현장에서는 냉철했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소박했다.

 

심장병으로 고생하다가 1972년 가장 높은 자리에서 물러난 제임스 와티는 2년 뒤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했다. 1974년 6월 8일이었다. 제임스 와티는 1966년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1994년에는 ‘비즈니스 명예의 전당’(New Zealand Business Hall of Fame)에 이름을 올렸다.                   


<글_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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