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59) 치유하시는 하나님

교민뉴스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59) 치유하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15:22~27>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 그 첫걸음이 담겨진 말씀입니다. 저들은 홍해를 건너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이 없어 고통을 당합니다. 마라에 이르러 드디어 물을 만났으나,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습니다. 백성들은 원망하고,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가르키시고, 나무를 물에 던져넣었더니 물이 달게 되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말씀을 주십니다. 본문 26절입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히브리어로 하면, 우리가 잘 아는 “여호와 라파 – 치유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여기서 치유란 단순히 “질병을 고쳐주신다.” 그런 의미만이 아닙니다. 이제 광야생활을 시작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책임져주심에 대한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지금 너희들이 마라의 쓴물을 만났지만 단물로 바꾸어준 것처럼, 앞으로 어떠한 삶의 문제가 있을지라도 “내가 바꾸어주겠다. 내가 고쳐주겠다. 내가 회복시켜 주겠다.”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사순절 기간을 지내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회복, 영적인 치유입니다.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눌 때에, 먼저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고, 이를 통해 내 모든 삶에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로, 내 삶의 모든 문제를 치유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의 삶을 가르켜 보통 “광야와 같은 인생길”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제 광야에 나왔습니다. 사실 저들은 홍해를 건너서 출애굽만 하면 다 될 줄 알았습니다. 모든 것이 다 형통하게 열려지고, 당장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복을 누리면서 살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광야에 나갔더니, 당장 물이 없어서 목마름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림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우리 삶에도 마라의 쓴물과도 같은 문제가 얼마나 많은지요? “야! 저기 물이 있다.” 달려가봤더니, 쓴물입니다. 마실 수가 없습니다. 더 큰 고통만이 남습니다. 자녀들의 학교 생활 속에도,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도 마라의 쓴물과 같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을 향한 기도도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원망이 가득합니다.” 사실 저들이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거든요. 앞서 홍해의 기적을 체험하고나서, 출애굽기 14장 31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이 말씀은 우리가 살아있는 한 마라의 쓴물과 같은 문제들은 끊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약속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하나님께 맡겨드리며 기도할 때에, 마라의 쓴물이 단물되는 역사가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홍해를 갈라주신 하나님께서, 요단을 멈춰세우신 하나님께서 나의 치유자가 되어주심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어떠한 삶의 문제가 있을지라도, 내 모든 삶의 문제를 치유하시고 회복시켜주시는 주의 은혜를 누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내 속사람의 치유를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서 홍해를 건널 때에도 일부러 가던 길을 돌이켜서 홍해 앞에 진을 치게 하셨습니다. 애굽 군사가 추격하는데, 도망갈 길 자체가 없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겨진 하나님의 의도가 있었죠. 모세가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 효과가 딱 3일만에 바닥이 났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시키시고자 마라의 쓴물로 인도하십니다. 저들이 길을 잘 못 들어서 마라에 도착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마라의 쓴물로 인도하신 거예요. 역시 이 안에 담겨진 하나님의 의도가 있죠. 마라의 쓴물 마셔보고, 그 쓴물과 같은 너 자신의 내면을 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마라의 쓴물에 나무가지를 던질 때에, 쓴물이 단물로 바뀌어집니다. 사람을 죽이는 물이 사람을 살리는 물로 바뀌어집니다. 이처럼 마라의 쓴 물과 같은 우리 내면에도 나무를 던져야 합니다. 어떤 나무인가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야말로 세상을 향해, 우리를 위해 그 몸을 던지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내어 맡기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쓰디쓴 마라와 같은 자아가 단물과 같은 거룩한 심령으로 변화될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주의 십자가를 내 마음에 품고, 주의 말씀에 나 자신을 비추어 볼 때에, 내 안에 더러운 것이 정결케 될 뿐만 아니라, 삶의 수많은 문제와 염려와 근심으로 일렁이는 우리 마음 속에 주님 주시는 참된 평안이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보게 하십니다. 


마라의 쓴물을 지나,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림에 이르게 됩니다. 엘림은 마라에서 남쪽으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입니다. 저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반나절만 내려오면 이렇게 좋은 곳이 있는데, 저 마라에서 그렇게 원망하고 그랬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지 않았을까요? 여러분! 혹 지금 이 순간 마라를 지나고 있습니까? 혹 지금 마라의 쓴물 속에서 원망하며 주저앉아 있습니까? 그 길이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길이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곧 엘림에 이르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늘 말씀드리잖아요.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 

  

엘림은 “상수리나무”, 또는 “큰 나무”라는 뜻입니다. 본문에 기록된대로 광야 사막 속에 위치하였음에도,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그루나 우거진 엄청난 오아시스입니다. 여기서 12나 70이나 다 완전수인데, 엘림 자체가 완전한 쉼의 장소임을 상징합니다. 동시에 천국의 소망을 보게 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천국”이 아니라, 천국의 소망을 보게 하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왜요? 아직 더 좋은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궁극적으로 가야하는 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입니다. 아무리 엘림이 좋아보인다 할지라도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본문 27절 마지막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엘림의 물 곁에 장막을 쳤다고 말씀하죠.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때로는 행진을 하고, 때로는 장막을 치고 머물기를 반복합니다. 그런데 이게 정해진 주기가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 따라서 가거나 멈추거나 하는 거예요. 


그럼 보십시오. 오늘 엘림 같은 곳에 장막을 치면, “야! 여기서 오래 좀 있었으면 좋겠다.” 싶을 겁니다. 그런데 어떤 곳은 “아유~ 빨리 다른 데로 갔으면 좋겠다.” 싶은 곳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오래 있고 싶어도 구름이 하루만에 떠오르면 가야 합니다. 내가 여기가 싫어서 빨리 움직이고 싶어도 구름이 일년씩 그대로 있으면 그냥 있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적인 순종을 훈련합니다.

  

실제로 40년 광야의 삶이 끝나고 다시금 가나안 앞에 섰을 때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요단을 건넙니다. 모세도 함께 가지 않습니다. 여호수아가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상황적으로는 오히려 40년 전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요단을 건너 담대히 나아갑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요? 전적인 순종의 훈련이 되었기 때문인거죠. 

 

 “아! 그래. 우리가 방금 저 마라의 쓴물에서 그렇게 원망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엘림을 우리에게 예비해놓으셨구나. 그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땅 가나안은 얼마나 귀한 곳일까?” 기대감과 소망을 가지고 전진하게 합니다. 우리도 이러한 동일한 기대감과 소망을 가지고, 마라의 아픔을 이겨내고, 엘림의 쉼을 누리고, 가나안의 축복을 향해 힘있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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