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14; 성형외과 의사- 해럴드 길리스 (Harold Gillies)

교민뉴스


 

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14; 성형외과 의사- 해럴드 길리스 (Harold Gill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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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6월 17일~1960년 9월 10일>



세계 의료계 멋지게 나타난  '20세기 성형수술의 아버지' 


성형외과 의사로서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자리였다. 

수술은 성공리에 마무리됐다. 얼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진 

해군 얼굴을 상당 부분 원래대로 되돌렸다. 

해럴드 길리스의 이름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이 수술 뒤 그는 ‘20세기 성형 수술의 아버지’라는 명예를 얻었다.



‘비포’(Before)와 ‘애프터’(After)하면 생각나는 건 성형수술 뒤 바뀐 얼굴 모습이다. ‘얼짱’은 부모 유전자가 아니어도 가능한 세상이 됐다. ‘돈이면 다 된다’는 말은 성형 세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얼굴이나 몸 일부를 더 아름답게 또는 멋지게 만들기 위한 미용 성형수술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요즘은 “나 칼 좀 댔어”하는 말을 자연스럽게 할 정도다. 멋지거나 아름다워지고 싶은 사람의 원초적 욕망을 현실로 만들어준 사람 얘기를 들어보자.



공부와 운동에서 일찌감치 두각 


 해럴드 길리스는 1882년 6월 17일 더니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돈 많은 국회의원이었다. 그는 공부와 운동에서 다른 학생들이 따라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크리켓 골프 럭비 가리지 않는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해럴드 길리스는 중등학교를 마치고 1901년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 이미 형 둘이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형들이 법학을 전공하고 있어 그는 의과대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뉴질랜드 천재는 케임브리지에서도 윤이 났다. 다른 학생들은 공부가 끝나면 젊음을 즐기려고 술집으로 갔지만 그는 기숙사 방에서 나올 줄 몰랐다.


 의과대를 마친 해럴드 길리스는 이비인후과 의사로 발령받았다. 몇 해를 의사로 근무하면서 진료와 공부를 함께 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운명을 바꾼 큰 사건이 터졌다. 1차 세계대전이었다. 

 

해럴드 길리스는 벨기에에 있는 한 병원으로 갔다. 거기서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삶의 방향을 틀게 한 사람들을 만났다. 먼저 온 프랑스 의사들이었다. 그들은 프랑스는 물론 전 세계에 잘 알려진 유명한 성형외과 전문의였다.



1차 세계대전으로 진로 바꿔

 

성형수술 현장을 지켜본 해럴드 길리스는 삶의 목적지를 정했다. 성형외과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일을 시작하자마자 봇물 터지듯 환자들이 밀려 들어왔다. 팔다리가 부러졌거나 심한 외상을 입은 군인들이었다. 불에 탔거나 수류탄에 얼굴을 맞아 형체가 심하게 일그러진 군인들도 많았다. 해럴드 길리스는 어떻게 하면 실의에 빠진 군인들에게 의사로서 도움을 줄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여러 얼굴 모양을 그림으로 그려 적용해 나갔다. 수제화 구두를 정성껏 만들 듯 다쳐서 얼굴 틀이 바뀐 그들에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얼굴에 가장 가까운 얼굴을 돌려주기 위해 숱한 날밤을 새웠다.

 

하지만 잘 지내던 프랑스 의사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더 협조하지 않겠다고 했다. 수술 현장에 해럴드 길리스가 같이 있는 것도 꺼렸다. 영국과 앙숙이었던 프랑스 의사들은 뉴질랜드 출신 영국인이 자기네 의술을 익히고 발전시키는 게 유쾌하지 않았다.

 

해럴드 길리스는 그래도 기가 죽지 않았다.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영국으로 돌아간 그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1917년 어느 날 유틀란트 전투(Battle of Jutland, 덴마크 유틀란트에서 영국과 독일 사이에 벌어진 해전)에서 심각한 화상을 입은 해군의 얼굴을 복구해야 하는 일을 맡았다. 성형외과 의사로서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자리였다. 수술은 성공리에 마무리됐다. 얼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진 해군 얼굴을 상당 부분 원래대로 되돌렸다. 해럴드 길리스의 이름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이 수술 뒤 그는 ‘20세기 성형 수술의 아버지’라는 명예를 얻었다.

 


성전환 수술 세계에서 처음으로 성공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성형환자가 줄어들었다. 대신 미용 목적의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코를 세우거나 귀를 예쁘게 만드는 미용 성형수술이었다. 1930년대 인기를 끌었던 흑백 영화의 배우들도 찾아왔다. 그렇지만 이 일에 해럴드 길리스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의사가 아닌 수선공이 된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성전환 수술을 집도한 의사로 해럴드 길리스를 꼽는다. 그는 소방관이 되고 싶었던 자매(2명)의 수술을 맡아 성공리에 끝냈다. 자매는 그토록 원했던 소방관이 되어 ‘형제처럼’ 지냈다. 그다음 남자를 여자로 바꾸는 수술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종교계와 언론에서 이 문제를 크게 다루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영국에 도착한 지 30년 만인 1930년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은 해럴드 길리스는 런던에 성형외과 병동을 세워 세계 곳곳에 성형수술의 중요성을 알린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1945년에는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버우드 병원(Burwood Hospital)에 성형외과 병동을 따로 세우는 일에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듬해인 1946년 해럴드 길리스는 영국 성형외과 의사협회 초대회장을 맡았으며, 세계성형외과 의사협회 명예회장도 지냈다. 1960년에는 미국 의사협회로부터 특별 감사장을 받았다.

 


미개척지에 ‘칼 댄’ 공로 크게 인정받아

 

해럴드 길리스는 1955년 늦은 가을 고국 뉴질랜드를 찾았다. 그는 친구에게 “내 고향 기즈번에서 살고 싶다”며 갈색 송어가 뛰놀고 포후투카와(Pohutukawa, ‘뉴질랜드 크리스마스 트리’라 부르는 꽃)가 사방에 피어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만끽하겠다고 말했다. 그 소박한 꿈은 현실로 이루어졌고 고향은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면적은 작지만 전 세계에서 영향력이 큰 인물을 많이 낳은 나라가 뉴질랜드다. 주 무대는 영국이었지만 해럴드 길리스가 키위라는 자부심을 품고 세계 의료발전에 끼친 공로는 지대하다. 미개척지에 칼을 대 후세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준 그는 우리가 자신 있게 자랑스러워해도 좋을 인물임이 분명하다.


 해럴드 길리스는 1960년 9월 10일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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