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22; 선교사 - 새뮤얼 마스든 (Samuel Mars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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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22; 선교사 - 새뮤얼 마스든 (Samuel Mars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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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5년 6월 25일~1838년 5월 12일>




200여 해 전 복음 씨앗 뿌린 '뉴질랜드의 사도' 


 새뮤얼 마스든 목사는 찬송가를 한 곡 부르고 이어 누가복음 2장 10절을 읽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뉴질랜드에 황금보다 더 값진 복음이 뿌려지는 순간이었다



뉴질랜드는 기독교 나라이다. 선조들이 기독교 정신으로 나라를 세웠다. 마오리가 살던 이 땅에 유럽사람(파케하)이 들어오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학교가 생기고, 국토가 좋아지고, 바다 건너 다른 나라와 무역을 했다. 남태평양에 있는 한 조용한 섬에서 지구촌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어엿한 한 나라’로서 입지를 다져 나갔다. 

 

서양 기독교 나라들이 다른 나라에 처음 들어갈 때 앞장세운 자원이 바로 ‘선교사’였다. 복음을 전한다는 명분으로 들어가 먼저 터를 잡으면 그 뒤를 이어 정부 관리, 군인, 상인들이 따라 들어오면서 나라 꼴을 만들었다.

 뉴질랜드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장 먼저 뉴질랜드(마오리 말로는 ‘아오테아로아’)에 도착한 사람은 개신교 선교사들이었다. 하지만 다른 나라와는 달리 영국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순수한 선교 차원으로 접근했다. 그 첫걸음을 내디딘 사람은 새뮤얼 마스든 목사였다.



아버지는 가난한 대장장이 출신

 

새뮤얼 마스든은 1765년 6월 25일 영국 요크셔에서 태어났다.(1764년 7월 28일에 태어났다는 주장도 있다) 부모는 대장간을 운영하면서 틈틈이 농사일을 했다. 마스든은 부모 일을 도우며 어린 날을 보냈다.

 20대 초반 엘런드 성직자협의회(Elland Clerical Society) 사무 요원으로 시작해 교계에 몸을 담았다. 2년 동안 신학 공부를 한 뒤 목사 안수를 받고 교구 목사로 사역을 해 나갔다.

 

새뮤얼 마스든은 1793년 4월 엘리자베스 프리스턴(Elizabeth Fristan)과 결혼했다. 이듬해 아내와 큰딸과 함께 호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복음을 전한다는 목적이었지만 그가 실제로 호주에서 보여준 모습은 사역자보다는 ‘사업가’에 가까웠다.

 파라마타(Paramata, NSW<뉴 사우스 웨일스>에 있는 도시)에 터를 잡은 새뮤얼 마스든은 3천 에이커(약 370만 평)가 넘는 땅을 사서 농사를 지었다. 채소를 심고, 밀을 재배하고, 옥수수를 경작했다. 크고 넓은 농장에서 나온 많은 작물은 풍요로운 삶을 보장했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정식 직함은 목사였다. 1800년부터 뉴 사우스 웨일스(New South Wales) 담당 목사로 일했다. 영국 정부에서 파견한 관리와 감옥에 있는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다. 뉴 사우스 웨일스(오늘날의 시드니, Sydney)는 주로 영국에서 사고를 친 죄수들을 받아들이는 곳으로 쓰였다. 영국에서 다루기 힘든 범죄인을 그 먼 호주까지 데리고 와 감방에 집어넣었다.

 


호주에선 ‘채찍질하는 목사’로 알려져

 

새뮤얼 마스든은 죄수들 사이에서 ‘채찍질하는 목사’(Flogging Parson)로 알려졌다. 가톨릭 신자들인 아일랜드 출신 죄수들에게는 더 무자비하게 대했다. 그 탓에 그는 아직도 호주에서는 목사로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즈음 고래와 바다표범이 큰돈이 된다는 사실을 안 많은 사람이 남태평양을 휘젓고 다니면서 돈을 끌어모았다. 당연히 뉴질랜드도 그 대상 가운데 하나였다. 신 개척지라고 할 수 있는 뉴질랜드에 먼저 깃발을 꽂겠다는 것이었다. 

 새뮤얼 마스든은 다른 차원으로 뉴질랜드에 다가갔다. 선교 깃발을 한번 꽂아보겠다는 생각이었다. 호주에서 목사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불명예를 씻어보겠다는 뜻도 담겨 있었다.

 

1809년 새뮤얼 마스든은 루아타라(Ruatara)라는 한 젊은 마오리를 만났다. 그 만남은 훗날 뉴질랜드 선교로까지 이어진다. 베이 오브 아일랜즈(bay of Islands) 마을 추장이었던 루아타라는 다른 마오리와는 달리 바다 너머 다른 세계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호주에서 온 포경선 일꾼으로 들어갔다. 일만 열심히 하면 영국 왕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말에 홀려 최선을 다해 고래 잡는 일을 도왔다. 

 몇 해를 그렇게 보내고 영국에 도착한 순간 선원들은 태도를 180도 바꿨다. “그냥 우스갯소리였다.” 단 한마디뿐이었다. 영국 왕을 만날 수 있다는 말에 삯도 못 받으면서 죽을힘을 다해 일했지만 돌아온 결과는 철저한 배신이었다.

 병들고 지친 젊은 마오리 추장 루아타라는 호주로 가는 배에 짐짝처럼 실렸다. 죄수들을 가득 태운 그 배에서 죄수 아닌 죄수가 되어 삶의 쓴맛을 처절하게 느껴야 했다.



구세주 같았던 새뮤얼 마스든 목사

 

그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사람이 새뮤얼 마스든이었다. 영국에서 볼일을 마치고 호주로 돌아가던 마스든은 배 한 귀퉁이에 쪼그려 앉아있던 초췌한 기색의 마오리를 눈여겨 보았다. 몇 해 전 자기 집에서 먹고 자던 루아타라였다. 자초지종을 들은 새뮤얼 마스든은 호주에 도착한 뒤 자기 집에서 몇 달 쉬게 하면서 극진한 대접을 해 주었다. 

 하지만 뉴질랜드에 복음 씨앗이 뿌려지기까지 시간이 더 필요했다. 북섬 베이 오브 아일랜즈에서 벌어진 마오리와 파케하의 전투로 파케하들이 큰 피해를 보았다. 그 누구도 마오리 전사들에게 선뜻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1814년 새뮤얼 마스든은 직접 배를 사서 띄웠다. 아무도 나서지 않은 첫걸음을 내디뎠다. 다행히 먼저 도착한 루아타라가 힘이 되어 주었다. 베이 오브 아일랜즈 한 바닷가에 도착한 날, 천 하나 걸치고 잠을 자야 했던 새뮤얼 마스든은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달빛이 휘영청 밝다. 내 옆에는 마오리 추장 조지와 그의 부인, 그리고 아이들이 자고 있다. 그들은 몇 해 전 백인들을 대학살 한 사람들이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다. 루아타라가 미리 손을 써놓은 결과였다. 며칠 뒤 새뮤얼 마스든 일행은 루아타라 마을에 들어갔다. 마오리들은 첫 예배를 위해 반 에이커(약 600평) 땅을 따로 마련했고 설교단도 만들어 놓았다.



1814년 성탄절에 첫 말씀 선포

 

이튿날은 12월 25일 성탄절이었다. 예수님이 태어난 날, 새뮤얼 마스든 목사는 아오테아로아(Aotearoa, 마오리 말로 ‘길고 흰 구름의 나라’라는 뜻)에 첫 복음을 선포했다. 인근에서 온 마오리 추장들과 뉴질랜드에 먼저 온 파케하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새뮤얼 마스든 목사는 찬송가를 한 곡 부르고 이어 누가복음 2장 10절을 읽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뉴질랜드에 황금보다 더 값진 복음이 뿌려지는 순간이었다.


 그 뒤 새뮤얼 마스든은 여섯 차례에 걸쳐 뉴질랜드를 찾아왔다. 1830년대 중반까지는 개종자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지만 1837년 일흔둘의 노구를 이끌고 마지막으로 찾았을 때는 큰 환영을 받았다. 호주에 바탕을 두고 뉴질랜드 사역을 한 지 24년 만이었다.

 

새뮤얼 마스든은 호주에서는 목사로서 빛을 내지 못했지만 뉴질랜드에서는 복음의 터를 다진 목사로 인정을 받고 있다. ‘뉴질랜드의 사도’(Apostle of New Zealand)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뉴질랜드는 그를 통해 기독교 나라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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