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72) 은혜의 보좌 앞에

교민뉴스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72) 은혜의 보좌 앞에 <히브리서 4:14~16>

우리나라 강원도 태백에 가면 두 개의 유명한 연못이 있습니다. 하나는 검룡소이고, 또 하나는 황지연못입니다. 이 연못들이 유명한 이유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강의 발원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이런 발원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강과 시내도 있는데, 이를 가르켜 “건천”이라고 부릅니다. 비가 오는 우기에는 강물처럼 물이 많이 흐르다가도 우기가 끝나면 흐르던 물이 말라 금새 바닥을 드러내는 그런 메마른 강, 메마른 시내입니다. 사막 지역에서는 “와디”라고 부릅니다. 

  

신앙의 삶 속에도 샘과 같은 신앙이 있는가 하면, 건천과 같은 신앙도 있습니다. 샘과 같은 신앙은 내 안에 성령의 충만함으로 신앙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 가지고 살아가는 자, 샘과 같이 마르지 않는 성령의 충만함, 은혜의 충만함 가운데 살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샘과 같은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건천과 같은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은혜가 충만할 때는 아멘도 잘하고, 앞장서서 순종하고, 누구보다 더 열심을 내서 헌신하다가, 어느 순간 은혜가 말라버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매사에 불평하고, 부정적인 말을 앞세우고... 그야말로 일희일비하는 신앙, 팍팍한 신앙의 모습인거죠.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갈 때에, 언제나 마르지 않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과 같은 은혜가 우리 안에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넘쳐흐르는 은혜를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 가운데 흘려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은혜의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또한 예비하신 축복이 무엇인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믿음의 도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본문 14절에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히브리서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비유합니다. 더불어 예수님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비유하십니다. 지금 첫 번째에 말씀드리고자 하는 믿음의 도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도리는 “사람이 어떤 입장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 길”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으로서 붙잡아야 할 가장 중요한 도리는 무엇보다도 “예수 십자가 부활”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도리를 굳게 붙잡는 것이 서론에 말씀드린 것처럼, 샘과 같은 신앙의 모습입니다. 때로 가뭄과 기근이 오는 것 같을지라도, 끊임없이 솟아나는 생수로 그 강이 마르지 않는 것처럼, 내 안에 확고한 믿음의 도리, “예수 십자가 부활”이 딱 중심을 잡고 있으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17장 7절과 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이 말씀은 우리 삶에 더위가? 있다는 거예요. 가뭄도? 있다는 거죠. 하지만 분명한 한 가지 사실, “그 나무가 물가에 심어져 있기에, 강변에 뿌리를 뻗치고 있기에, 여전히 그 잎은 청청하며, 나무의 결실은 그치지 않음”을 말씀합니다. 믿음의 도리를 굳건히 잡을 때에, “예수 십자가 부활” 그 영적인 힘이 나를 계속 살아있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친히 대제사장이 되시고, 친히 제물이 되심으로, 자신의 몸을 드려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길이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 걸어가야 할 “예수 십자가 부활의 길 - 믿음의 도리”입니다. 믿음의 도리를 붙잡고 흔들림 없는 신앙의 길을 걷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체휼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본문 15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예전에 보던 개혁한글판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전에 보던 개혁한글판 성경에는 “체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었는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동정”이라는 단어로 바꾸었습니다. 

  

본문 15절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 그렇기에 인간의 모든 연약함까지도 다 똑같이 가지고 계신다. 심지어 인간처럼 시험도 받으셨는데, 다만 다른 것은 죄가 없으시다는 사실이다.” 이에 가장 적절한 단어가 아무래도 “동정”보다는 “체휼”입니다. “동정”이라고 하면, 보통 “저 사람 참 불쌍하다.” 이런 감정적인 차원에서 끝나기 쉽습니다. 하지만 체휼은 “몸 체 자에 불쌍할 휼”자를 씁니다. 다시 말해, 내 몸으로 직접 그 사람의 처지를 겪어보고, 체험해보고, “아 이렇게 어려운 거구나.” 몸으로 깨닫는 겁니다. “동병상련”과도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이땅에 오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셨습니다. 결정적으로 죄의 유혹도 함께 받으셨지만, 말씀으로 이겨내셨습니다. 인간의 죄로 인한 죽음까지도 체휼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완전한 생명을 얻을 길이 열려졌습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체휼의 은혜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와 함께 모든 것을 체휼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그렇게 살아라. 너희들이 그렇게 살기를 원하여 내가 너희에게 본을 보였노라.” “너희들이 그렇게 살면 그 모습을 통해서 너희들이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도 베드로전서 3장 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이 말씀 역시 개역한글판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함으로,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체휼의 은혜를 함께 누리라는 것입니다. 은혜는 나누고 나눌수록 더 아름답게 변합니다. 온 세상을 변화시켜 나갑니다. 서론에 말씀드린 샘물들이 솟아나는 물을 흘려보내지 않고, 내 안에 가두기만 하였다면, 한강도, 낙동강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샘도 결국은 다 썩어버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체휼의 은혜를 내 삶에 누리고, 또한 감사하며 나누고, 또한 흘려보내는 삶을 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본문 마지막인 16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이 말씀에 담겨진 신앙의 행위가 있습니다. 뭔가요? 기도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기도를 위해서 제일 먼저 무엇을 받아야 합니까? 긍휼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신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 그냥 받아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은혜가 없다면, 주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것, 우리는 스스로 “내가 하는 거다. 내 열심 가지고 하는 것이다.”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긍휼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때에, 그 앞에 기도할 때에, 우리에게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임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삶에, 자녀손들의 앞길에, 때를 따라 돕는 주의 은혜가 충만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실수를 저지를 때가 있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에서 “때”를 내 중심적으로만 해석하는 겁니다. “때”를 내 주관적인 관점으로만 해석하는 겁니다. “때”를 내 임의대로 정해놓은 그 시간으로 확정지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3장 11절에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십니다. 하지만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시작과 끝을, 즉 때를 측량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누린다는 것은, 우리의 계획과 뜻대로 모든 것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을 주님 앞에 맡겨드리고, 하나님께서 가장 합당한 때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응답하시는 은혜를 기대하고 체험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때를 따라 도우시는 주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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