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43 마오리 정치인 - 아피라나 응아타 (Apirana Ngata)

교민뉴스


 

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43 마오리 정치인 - 아피라나 응아타 (Apirana Ngata)

일요시사 0 396 0 0

<1874년 7월 3일~1950년 7월 14일>



마오리로 태어나 마오리를 위해 한평생 살다 


1928년 다시 집권한 진보당은 연합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아피라나 응아타는 당 서열 3위에 올랐다…

역사가들은 아피라나 응아타가 조금만 더 늦게 태어났으면 

‘마오리 출신 첫 총리’가 됐을 것이라고 적고 있다.



대한민국 민족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일제 강점기 시대와 해방 공간 그리고 암살되기 전까지 보여준 그의 사심 없는 나라 사랑은 대한민국 근 현대사 한 페이지를 멋지게 꾸몄다. 

 

사람이 살지 않았던 뉴질랜드 땅에 마오리(Maori, 뉴질랜드 원주민)가 먼저 들어와 주인이 됐다. 몇백 년 단일민족을 이어오던 이들은 어느 날 강대국의 식민지 개발 정책에 밀려 파케하(Pakeha, 유럽계 백인)에게 뉴질랜드의 새 주인 자리를 넘겨주고 만다. 약자의 설움을 피할 수 없었던 현실에서 마오리 혼을 지키려고 애쓴 아피라나 응아타는 ‘뉴질랜드의 백범’ 같은 존재였다.



마오리 최초 대학 졸업생으로 기록


 응아타는 1874년 7월 3일 기즈번에서 북쪽으로 175km 떨어진 테 아라로아(Te Araroa)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오리, 어머니는 스코틀랜드 사람이었다. 그는 태생적으로 양쪽 문화와 역사, 정서를 공유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정부 녹을 먹는 재산 평가사였다. 파케하와 결혼한 아버지는 아피라나 응아타에게 “서양문물은 배우되, 마오리의 혼은 꼭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

마오리들이 많이 다니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앵글리칸 교회(성공회)가 세운 테 아우테 칼리지(Te Aute College, 1854년 설립)를 다녔다. 그곳에서 아피라나 응아타는 눈에 띄는 지도력을 보여 주었다. 

학업 능력도 뛰어나 장학금을 받아 캔터베리대학에 들어가 1893년 정치학 학사 학위를 땄다. 마오리 역사에서 맨 처음 대학 졸업생이었다. 이듬해에는 정치학 석사모를 썼다. 3년 뒤 다시 오클랜드대학에 입학해 법학 학사 과정을 마치고 법조인이 됐다.

몇 해 동안 법률 일을 보기도 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다. 아피라나 응아타의 꿈은 딴 곳에 있었다. 마오리 권익을 지키며 평생을 살겠다는 것이었다. 파케하의 뉴질랜드 진출이 자리를 잡아 가면서 토착민인 마오리들은 반대로 삶의 터전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때 아피라나 응아타가 맨 앞에 등장했다.



칼리지 학생 중심 '마오리 젊은이당' 만들어  

 

아피라나 응아타는 마오리 경제와 사회를 좋게 하는 데 앞장섰다. 여러 모임에 나가 마오리가 사람답게 대접받으며 살 방법을 제시했으며, 신문 매체를 통해 권익을 주장하기도 했다.

아피라나 응아타는 자기가 공부한 테 아우테 칼리지 학생들을 중심으로 ‘마오리 젊은이당’을 만들었다. 훗날 마오리 의사이자 정치인이 된 피터 벅(Peter Buck)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젊은이들과 실험 삼아 해본 이 일을 계기로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1900년 초 아피라나 응아타는 내무부 장관 제임스 캐럴(James Carroll, 1857~1926)과 함께 법안 작업에 손댔다. 마오리 토지관리법과 마오리 위원회법이었다. 이 법안 제정을 마친 뒤 응아타는 국회에 들어갔다. 

의정활동은 누구보다 돋보였다. 꼼꼼한 자료 조사로 실제 도움을 주는 법안을 마련해 지역구 주민은 물론 많은 키위에게 ‘훌륭한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가 마오리 피가 섞인 국회의원이라는 점 때문에 일반 국민에게는 독특하게 보였지만, 뛰어난 웅변 실력을 갖춘 위풍당당한 모습은 다른 파케하 국회의원들을 꼼짝 못하게 한 그만의 무기였다.

1차 세계대전 일어나자 발 벗고 지원

 

아피라나 응아타가 맡은 일은 마오리와 관련한 것들이었다. 마오리와 파케하 사이의 평화, 마오리 권익을 지켜주는 일들이었다.

1912년 진보당(Liberal Party)은 정권을 유지하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일하면서 더 활발한 의정활동을 펼쳐 나갔다. 1928년 정권을 되찾기까지 상당한 정치 힘을 보여주면서 외연을 넓혀갔다.

아피라나 응아타는 와이아푸 농부조합(Waiapu Farmers’ Cooperative Company)을 만들었다. 애초에 응아티 포로우(Ngati Porou, 마오리 부족 가운데 하나) 농부들 중심으로 설립한 조합은 마오리들이 받는 혜택이 알려지면서 다른 지역에서도 자리를 잡게 된다. 아울러 억울하게 땅을 빼앗긴 마오리들이 땅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응아타의 법률 지식이 큰 몫을 했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아피라나 응아타는 발 벗고 전쟁지원에 나섰다. 자기가 직접 싸움터에 나가고 싶었지만 40세라는 나이 때문에 포기했다. 대신 마오리 부대를 편성해 세계평화를 지키는 데 힘을 보태 주었다.

또 다른 업적은 마오리의 사회, 경제, 문화적 지위를 높여준 일이었다. 오랫동안 뉴질랜드 주인이었던 마오리들은 변두리로 밀려나 있었다. 겉으로는 국민 대우를 해줬지만 속으로는 어느 정도 무시한 것이 사실이었다.


마오리 춤 ‘하카’(Haka) 널리 알려

 

이 문제를 정식으로 다룬 사람이 아피라나 응아타였다. 그는 마오리들도 스포츠를 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만들어 주었으며, 오늘날 마오리 춤을 대표하는 ‘하카’(Haka, 전쟁에 나가기 전에 추는 춤으로, 럭비 대표팀 올 블랙스가 국제 시합 전 추면서 널리 알려졌다)를 널리 알렸으며, 전통 예술품인 마오리 카빙(Maori Carving, 손 조각품)의 기술 전수에 나라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1927년 로토루아(Rotorua, 북섬의 대표 관광지)에 세운 마오리 예술학교도 그의 도움 덕분이었다.

1928년 다시 집권한 진보당은 연합당(United Party)으로 이름을 바꿨다. 아피라나 응아타는 당 서열 3위에 올랐다. 그는 종종 부총리를 대신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역사가들은 아피라나 응아타가 조금만 더 늦게 태어났으면 ‘마오리 출신 첫 총리’가 됐을 것이라고 적고 있다. 

아피라나 응아타가 이때 역점을 둔 일은 토지개혁운동이었다. 마오리들의 아낌없는 지지를 받으면서 힘차게 운동을 펴 나갔다. 파케하들은 그를 못마땅해 했지만 마오리 사회에서 그는 절대영웅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아피라나 응아타가 해온 일에 나랏돈이 잘못 쓰였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응아타가 ‘눈엣가시’ 같았던 파케하 의원들이 그를 확실하게 정계에서 내몰 수 있는 기회였다. 결론은 ‘나랏돈이 잘못 쓰인 점은 있지만 개인 잘못은 없다’는 것이었다. 일을 너무 열심히 하다가 생긴 실수였다. 마오리들은 이 문제를 ‘아피라나를 정치판에서 내몰기 위한 공작’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는 조사 결과에 따랐다.

  


마오리 고고학 학문으로 세워


1943년 아피라나 응아타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강조한 마오리 혼을 놓지 않았다. 와이탕이 조약 100주년 기념행사를 도왔으며, 마오리 부대를 다시 편성해 2차 세계대전에 보냈다. 오클랜드대학에 마오리 어른을 위한 강좌를 열기도 했다. 또 마오리 성경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마오리 관련 고고학을 학문으로 세워 주었다. 마오리로 태어난 그는 한평생을 마오리로, 마오리를 위해 살았다.

 아피라나 응아타는 제임스 캐럴(첫 마오리 국회의원)과 마우이 포마레(Maui Pomare, 1876~1930, 마오리 의사)에 이어 세 번째로 기사 작위를 받는 영광을 누렸다. 정부는 응아타의 공적을 높이 사, 50달러 종이돈에 그의 얼굴을 새겨 넣었다. 늘 기억해야 할 ‘히스토리 메이커’라는 뜻이었다.



글_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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