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96) 다니엘의 형통의 비결

교민뉴스


 

뉴질랜드 광림교회 <김성원 목사>주일설교 (196) 다니엘의 형통의 비결 <다니엘 6장 1-15절>

오늘 말씀에서 나누고자 하는 주인공은 기도의 대명사 다니엘입니다. 다니엘 하면 다들 믿음과 정절을 잘 지켜서, 하나님께 끝까지 기도한 인물로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본문이 처해 있는 시대적 상황은 역사적인 격변기의 시대입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포로의 신분으로 바벨론이라는 대제국에서 고위 관직에 올랐던 다니엘이, 바벨론이 멸망하고 이후에 패권을 잡은 메대 바사 제국에서도 고위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다니엘이 다리오 왕과의 관계를 어찌하였는지, 또 정치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6장 마지막 절인 28절에서 말년의 다니엘의 인생을 평가하기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가 형통을 누릴 수 있었던 비결은 오늘 본문 말씀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함께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시며, 그가 형통을 누릴 수 있었던 비결을 발견하고 교훈을 삼아, 우리 삶에도 적용할 수 있는 은혜를 얻고자 합니다. 



첫번째로, 주를 가까이하였습니다. 

  

다니엘이 포로의 신분에서 시작하여, 바벨론에서 총리의 자리에 오르고, 이어서 패권을 잡은 메대바사 제국에서도 총리에 오를 수 있었던 첫번째 비결은 3절 말씀에 나옵니다. 3절 말씀입니다.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고관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 여기서 다리오 왕이 왜 다니엘을 다른 2명의 총리들 보다도 더 높은 최고의 자리에 올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의 마음이 민첩하였기 때문이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이 민첩하다는게 무슨 뜻일까요? 얼핏 보면 그가 행동이 재빠르고 계산이 빨라서 왕의 실무를 굉장히 잘 보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물론 다니엘의 실무적인 능력이 굉장히 뛰어났던 것도 사실이지만, 지금 이 때 당시의 다니엘의 나이가 얼마인 줄 아십니까? 처음 10대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서 바벨론의 멸망과 메대 바사 제국의 흥황을 보았습니다. 이 때 다니엘의 나이는 80이 넘은 나이였습니다. 

 

 ‘그의 마음이 민첩하였다’라는 말의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루아흐 앗티라 빼흐’입니다. 직역하면, ‘그의 안에 탁월한 영혼이 있었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여러분도 잘 아시는 단어가 나옵니다. 바로 ‘루아흐’ 이것은 하나님의 영 혹은 하나님의 숨결을 뜻할 때에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렇기에 여기서 ‘그의 안에 탁월한 영혼이 있었다’라는 뜻은 그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였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그의 안에 하나님을 가까이함으로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였고, 그러한 상태를 평생 유지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지자로 쓰임을 받았을 뿐 아니라, 고령에도 불구하고 또 제국이 격변하는 가운데서도 전에 알지 못한 새로운 왕국의 왕에게까지도 크게 신임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 첫번째 비결은 다름 아닌 주를 가까이함이었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였었던 것은 이어지는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을 시기한 다른 2명의 총리와 고관들이 다리오 왕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기도하지 말라는 계략을 꾸몄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데, 그가 했던 기도의 모습을 10절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다니엘은 기도할 때 예루살렘 방향으로 앉아서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였던 것은, 비록 그가 포로의 신분으로 이방 땅으로 끌려와 인생의 대부분의 삶을 이방 땅에서 보내었지만, 그의 마음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계시며, 그의 시선이 늘 하나님을 향하여 주께 까까이 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어서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은 아침, 정오, 그리고 저녁 시간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집 2층 방에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기 위해서는, 아침에 왕실에 출근했다가 저녁에 퇴근한다고 가정할 경우, 반드시 정오에도 집으로 돌아와야 했을 것입니다. 집과 왕실을 오고 가는 것도 번거롭지만,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영적 싸움일 것입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그의 평생을 영적인 싸움을 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가까이함으로 영적인 싸움을 하였기에, 시대가 변하는 격변기 속에서도 다니엘은 평안할 수 있었습니다. 주께 가까이함이 복임을 기억하셔서, 주님 한분으로 만족하는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두번째로, 주께 충성하였습니다. 

  

다니엘이 형통할 수 있었던 두번째 비결은 4절 말씀에 나옵니다. 4절 말씀을 보시면, “이에 총리들과 고관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발할 근거를 찾고자 하였으나 아무 근거, 아무 허물도 찾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 여기서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다니엘 그가 ‘충성되었다’라고 표현합니다. 다니엘의 충성은 누구를 향한 충성이었을까요? 당연히 하나님을 향한 충성이었습니다. 

  

10절 말씀에 보시면, 다니엘은 왕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기도할 수 없다는 법에 왕이 도장을 찍은 사실을 알고도 집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여기서 ‘알고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어를 직역하면, “확실하게 알았음에도 불구하고”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하던대로 기도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그 모든 것을 확실하게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다니엘의 행위는 보기에 따라서는 단순히 법을 어긴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왕에 대한 반역으로도 보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왕의 조서를 어긴다는 것은 곧 왕에 대한 반역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심지어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창을 열어놓고 공개적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법과 메대,바사의 법, 곧 다리오의 법 중 어느 법이 우선적으로 지켜져야 할 법인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누구에게 충성을 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우상 문화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여호와 하나님만을 신실하게 믿고 섬긴 다니엘이 신앙 문제 때문에 주변 사람들과 갈등을 겪고, 고난을 당했을 것은 안 보아도 뻔한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여지는 사건은 다니엘이 이방 나라에 끌려와서 당한 여러 가지 형태의 고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긴 세월 동안 수도 없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하나님께 충성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십시오. 변질되지 마십시오. 쉽게 변해버리는 신앙은 하나님의 평안 안에 거하기 쉽지 않습니다. 다니엘은 인생을 걸고 충성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신앙의 정절을 지켰고, 하나님께 충성하기를 끝까지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끝까지 충성함으로 주의 보호하심 아래에서 평안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끝으로, 주께 기도하였습니다.

  

다른 총리들과 고관들이 정치적인 모습에서 다니엘의 결점을 찾으려 하였으나, 찾지 못하자 5절에서와 같이 말합니다.  “그들이 이르되 이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율법에서 근거를 찾지 못하면 그를 고발할 수 없으리라 하고” 이 말은, 그에게 결점이 없으니, 결점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가 어김없이 반드시 걸려들 것은 하나님의 율법 밖에 없다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반대로 보면 그를 적대시하던 자들도 다니엘이 율법을 지키는 일에 성실하고 필사적이었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자랑스러운 인정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 모습은 참 제게도 그렇고 믿음의 성도들에게 도전이 되고 귀감이 되는 모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나를 볼 때에, “저 사람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에 성실하고 어김이 없다.”라는 인정은 사모할 만하고 도전할 만한 모범입니다. 

  

우리가 10절에서 주목해 봐야 하는 사실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바로 ‘전에 하던 대로’입니다. 다니엘은 작은 고난 정도가 아니라, 왕의 명령을 어긴다는 오명으로 죽음에 처할 것을 알고도,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상황과 형편에 따라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전에 하던 습관을 따라 기도하였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에 보시면, 베드로 사도는 노아가 방주를 만들던 일을 ‘그가 의를 전파하였다’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다른 것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거나, 예배를 했다라는 표현이 아닙니다. 그는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그것을 어떻게 변화시켜 표현합니까? ‘노아는 의를 전파했다’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비록 노아가 온 동네 방네 다니면서 “하나님께 돌아오십시오. 회개하고 구원 받으십시오!”라고 외치고 다니지는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무려 120년 동안 한 자리에서 방주를 만들었던 그의 모습이 곧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전파하는 빛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다니엘, 비록 그의 상황과 형편이 기도를 방해하고, 기도를 할 수 없게 만드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전에 하던 대로 기도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마치 습관에 따라 산에 올라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처럼, 그는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다니엘의 가장 큰 능력의 비결이 담겨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하기를 쉬지 마십시오. 한번 해보십시오. 형언할 수 없는 평안이 임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 무엇을 하지 말라 말씀하셨을 때, 우리는 착각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위해 내가 해드리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을 하셨을 때에 그것은 대부분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형통과 우리의 축복을 위한 길을 지도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의 상황과 형편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가 어렵다고 핑계를 댑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 해드리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의 이득과 나의 복을 위한 길이라고 한다면 핑계하며 미루지 않을 것입니다. 당장에 뛰어들어서 어떻게 해서든지 성취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일이, 우리의 형통을 위한 비결임을 기억하셔서, 주님을 늘 가까이하시고, 주님께 충성 하시고, 날마다 깨어 기도하심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실 때에, 주께서 주시는 인생의 참된 형통의 은혜를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0360ad91072e0fe38a792f9248223dc4_1669680559_967373.jpg
 

0 Comments
광고 Space available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KakaoTalk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