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47 ; 오페라 가수 - 키리 테 카나와 (Kiri Te Kana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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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47 ; 오페라 가수 - 키리 테 카나와 (Kiri Te Kanawa)

일요시사 0 375 0 0

<1944년 3월 6일~  >




입양 슬픔 딛고 '20세기에 가장 뛰어난 성악가'로 우뚝 


1971년 12월 1일, 코번트 가든(Covent Garden) 왕립 가극장 

무대에 올려진 공연에서 키리 테 카나와는 

아리아 ‘사랑의 신이여 사랑을 내리소서’를 미친 듯이 토해냈다.

 객석에서는 박수가 끊이지 않고 터졌다. 다음 날 신문에 

“새로운 오페라 스타가 태어났다”는 큼직한 활자가 박혀 있었다.



쉽게 생각하자. 키리 테 카나와는 ‘뉴질랜드의 조수미’이다. 조수미가 손해인지, 키리(애칭)가 손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키리 테 카나와를 기억하는 가장 무난한 방법이다. 

 


1981년 ‘20세기 최고의 결혼식’서 축가 불러

 

1981년 7월 29일 영국 런던 세인트 폴 대성당(St. Paul’s Cathedral)에서 ‘20세기 최고의 결혼식’이 열렸다. 찰스 왕세자와 유치원 교사 출신 다이애나가 주인공이었다. 이 자리에서 마오리 아버지와 아일랜드 어머니 피가 반반 섞인 오페라 가수, 키리 테 카나와는 ‘20세기에 가장 뛰어난 성악가’다운 미성을 선사했다. 텔레비전으로 이 장면을 지켜보던 6억이 넘는 지구촌 시청자들은 결혼식 너머 울려 퍼지는 천상의 목소리를 즐길 수 있었다.


키리 테 카나와는 1944년 3월 6일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뜬다는 기즈번에서 첫울음소리를 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세상 빛을 본 지 5주 만에 부모 품을 떠나야만 했다. 키울 능력이 없던 친부모는 그를 입양 보냈다. 

공교롭게 양부모도 생부, 생모와 같은 마오리 아버지와 아일랜드 어머니였다. 카나와는 천금 같은 새 부모를 만나는 행운을 안았다. 자식들을 오페라 가수로 키우고 싶었던 양엄마 넬(Nell)은 친자식들이 음치라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음악에 소질을 보인 카나와에게 온 정성을 쏟았다. 다섯 살 때부터 음악에 두각을 나타낸 키리 테 카나와는 나중에 양부모가 생활무대를 오클랜드로 옮길 정도로 탁월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열두 살 되던 해, 가족이 오클랜드로 올라온 것을 계기로 그는 성악발성법으로 유명한 세인트 메리 수도원학교(St Mary’s Convent) 메리 레오 수녀(Sister Mary Leo, 1895~1989)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얼마 안 있어 키리 테 카나와는 호주, 뉴질랜드를 비롯해 남반구 나라 음악경연대회를 휩쓸었다. 

뉴질랜드가 한없이 좁게 느껴졌던 키리 테 카나와에게 세계무대가 마침내 손짓한다. 런던 오페라센터(London Opera Centre)에서 장학금을 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영국으로 무대를 옮긴 키리 테 카나와는 백인들의 전유물이었던 오페라계에서 당당히 실력으로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 키리 테 카나와 음악의 백미는 1971년에 공연한 모차르트 작품 <피가로의 결혼>이었다. 그는 공연에서 백작 부인 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며 ‘세계 성악계의 빛나는 보석’으로 자리매김했다. 



<마농 레스코> 같은 오페라에서 주연 맡아

 

1971년 12월 1일, 코번트 가든(Covent Garden) 왕립 가극장 무대에 올려진 공연에서 키리 테 카나와는 아리아 <사랑의 신이여 사랑을 내리소서>를 미친 듯이 토해냈다. 객석에서는 박수가 끊이지 않고 터졌다. 다음 날 신문에 “새로운 오페라 스타가 태어났다”는 큼직한 활자가 박혀 있었다.

키리 테 카나와는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장미의 기사>, <박쥐>, <마농 레스코>, <오텔로>, <아라벨라>, <카프리치오> 같은 많은 오페라에서 주연을 맡아, ‘20세기에 가장 뛰어난 성악가’로 인정받았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파리오페라, 시드니오페라 하우스, 런던의 로열오페라 하우스, 밀란의 라 스칼라가 주 무대였다. 


키리 테 카나와의 음악 영역은 말 그대로 ‘하늘에서 땅까지’의 모든 곡을 소화해 낼 정도로 놀라웠다. 바흐, 헨델, 모차르트, 베토벤의 클래식부터 베르디, 푸치니의 정통 이탈리아 오페라까지 여러 분야에서 가장 멋진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또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같은 뮤지컬에도 출연해 보통 사람들과 호흡을 나누었다. 

오페라 세계에서 나이 50이 넘었다는 것은 ‘한물 지난’ 것을 뜻한다. 하지만 쉰이 지나서도 키리 테 카나와는 대중과 함께 호흡을 해왔다. 일반인들에게는 거리가 느껴지는 오페라, 그 차원을 넘어서 대중과 어울려 울고 웃는 음악 세계를 맘껏 보여주었다.



남편 데즈먼드의 사업 기질 돋보여


 그 성공 뒤에는 남편이 있었다. 키리 테 카나와는 1967년 아는 사람 소개로 만난 데즈먼드 파크(Desmond Park)와 결혼했다. 데즈먼드 파크는 아내 키리 테 카나와의 음악을 상품으로 만드는 데 놀라운 능력을 보여 주었다. 그가 제작한 오페라 실황 음반은 음악 애호가들의 호평을 얻었다. 아울러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왕비의 결혼식 축가, 1994년 올려진 키리 테 카나와의 50회 생일 기념공연도 남편의 손을 거쳐 특별한 작품이 됐다. 

그들은 두 번에 걸친 자연 유산 끝에 두 아들을 입양해 행복한 부부생활을 유지해 오다 1997년 결혼 30년 만에 이혼 서류에 서명했다.


키리 테 카나와는 고국 뉴질랜드는 물론 자기 꿈을 펼치는 데 큰 힘이 되어 주었던 호주 무대를 좋아했다. 1997년 9월 호주 남부 얄카리나 골짜기에서 색다른 공연이 열렸다. 카나와는 오페라 <아리아>와 호주 민요인 <워리우타의 노래>를 멋지게 뽑아내 기차를 타고 온 수천 명의 관객을 즐겁게 해 주었다. 


카나와는 1960년대 이후 비록 뉴질랜드를 자주 찾지 못했지만 1990년 오클랜드 도메인(Auckland Domain, 오클랜드 시내에 있는 넓은 공원)에서 열린 콘서트에는 당시 오클랜드 사람 여섯 명 가운데 한 명이 참석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14만 명).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00년 1월 1일 새천년 새벽에는 자기 고향 기즈번에서 세계에서 가장 먼저 뜬 해를 바라보며 ‘바닷가 음악회’(Beach Concert)를 열어 전 지구촌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이 콘서트는 전 세계 55개 나라에 생중계되어 뉴질랜드를 빛낸 키위 가운데 한 사람인 키리 테 카나와의 이름값을 더 높여주었다.

 


재단 설립해 뉴질랜드 음악 꿈나무 지원

 

1981년 찰스와 다이애나 결혼식에서 축가를 불러 영국 왕실로부터 데임(Dame, 남자의 기사 Knight에 해당)의 작위를 받은 키리 테 카나와는 10여 개 나라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95년에는 ‘뉴질랜드를 빛낸 사람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뽑혔다. 2003년에는 자기 이름을 따서 키리 테 카나와 재단(Kiri Te Kanawa Foundation)을 세워 뉴질랜드 성악 꿈나무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글_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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