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98); 나는 선한목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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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98); 나는 선한목자라! <요한복음 10:11~18>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0장을 보면, 전체 42절 중에 딱 절반인 21절까지가 목자와 양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선한 목자로 이 땅에 오셨고, 양들의 문이 되어 주심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자연스럽게 예수 믿는 우리들은 다 양과 같은 존재라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유대 사회에서 양을 키우지 않는 집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목자와 양의 관계로 자신과 믿음의 백성들의 관계를 설명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스스로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구약의 말씀에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심으로 모든 택함 받은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돌보시겠다고 말씀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의 성취를 이루시고자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 가운데 오셔서 선포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너희의 목자가 되어 주겠다.”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선언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그렇다면 “선한 목자” 그 안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가요? 예수님께서는 왜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시나요?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선한 목자 예수님은 

내 삶의 인도자이십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유대인들은 집집마다 거의 다 양을 기릅니다. 보통 한 열 마리 내외의 양들을 기릅니다. 양을 아예 많이 기르면 양만 기르는 사람을 고용합니다. 그 사람이 삯꾼입니다. 그런데 열 마리 키우자고 삯꾼을 고용하기는 어렵죠. 그래도 양은 키워야겠고, 그렇 어떻게 하는가? 마을에서 공동우리를 만들어놓고는 사람들이 돈을 조금씩 모아서 전체 양을 관리할 사람을 삯꾼으로 고용하는 겁니다. 그럼 어떤 문제가 생길까요? 각각의 집에서 양을 가져다가 공동 우리에 넣었으니, 양들이 다 뒤섞일 것 아닙니까? 

  

본문 앞에 있는 3절에서 5절까지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목자가 양을 부르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가고,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기에 따르지 않고 오히려 도망한다.” 양이 자기 주인의 음성을 정확히 안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귀한 영적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 되심으로 우리 삶의 인도자가 되어주시는데, 양 된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목자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거기에 살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내 삶의 인도자가 되십니다. 목자의 인도함 가운데 거하는 양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양이 짐승을 걱정하나요? 양이 가뭄을 걱정하나요? 양이 갈 길을 걱정하나요? 그 모든 걱정은 목자의 몫입니다. 양의 몫이 있다면? 그건 단 하나!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 뿐입니다.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주의 음성 따라 순종하며 나아갈 때에, 그 길의 끝에 쉴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의 기쁨이 있는 줄 믿습니다. 가장 선한 길로 이끄시는 주의 은혜가 있는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의 인도하심 안에 거하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선한 목자 예수님은 

내 삶의 보호자이십니다. 


본문 11절과 12절에 말씀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유대 사회에서 마을 공동농장에는 양을 맡아서 관리하는 삯꾼이 있습니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이들은 목자가 아닙니다. 삯꾼입니다. 저들은 양을 관리해주고, 그에 합당한 댓가를 받기 위해서 고용된 일꾼일 뿐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책이 세 권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이고, 또 하나는 탈무드이고, 또 하나는 미쉬나입니다. 그 중에서 미쉬나는 율법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실생활에 맞게 풀어서 기록한 해설서입니다. 거기 보면 삯꾼이 양을 지킬 때의 책임규정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리나 늑대 한 마리가 양을 잡아먹기 위해서 공격을 합니다. 그러면 삯꾼이 방어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두 마리, 세 마리의 짐승이 공격을 하면 어떻게 하나요? 그럴 때는 양을 버리고 도망가도 삯꾼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없습니다. 삯꾼이 양을 돌보는데, 이리 떼가 몰려들면 도망가는 게 정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선한 목자가 되심으로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다고 말씀합니다. 삯꾼이 도망가는 것이 지탄받을 일이 아니라, 목자가 도망가는 게 비정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시는 것이 비정상적인 일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일을 위해 이 땅에 오시고, 그 일을 십자가에서 실제로 감당하신 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 예수님은, 선한 목자 예수님은 내 삶의 보호자가 되십니다. 

오늘 본문에 분명히 그렇게 선언하셨을 뿐만 아니라, 정말로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하심으로, 죄와 사망의 공격에서 우리를 보호해주셨습니다. 출애굽 문설주에 발라진 어린양의 피가 그 집에 임하는 죽음의 기운을 막아낸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이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보호해주십니다. 

  

앞으로도 보호해 주실 줄 믿습니다. 천국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우리 모든 믿음의 백성들을 보호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의 보호하심 안에, 담대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선한 목자 예수님은 

모든 이의 구원자이십니다. 


본문 16절에 말씀합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구원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제한이 없습니다. 그런데 16절의 말씀처럼, “아직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있습니다.” 아직 구원의 자리에, 예수님을 믿는 자리에, 예수님을 영접한 자리에 오지 않은 이들이 있다는 거죠. 예수님께서는 저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저들도 내 음성을 듣고 구원의 자리에 이르게 하겠다.”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이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르켜 “나는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시고, 이어서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양은 그릇 행하고, 각기 제 길로 갔지만, 그래서 양은 그에 합당한 징계를 받아야 했지만, 선한 목자 예수님께서 그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심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주셨습니다. 자기의 몸을 버려 남을 살리시는 구원의 은혜입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모든 이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무엇보다 나의 구원의 주가 되셨습니다. 우리 모든 믿는 자의 구원의 주가 되십니다. 나아가 아직 믿지 않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도 구원의 주가 되십니다. 또한 믿지 않는 저들에게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이미 구원의 자리에 선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사명인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또한 증거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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