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49; 희극인 - 빌리 제임스 (Billy James)

교민뉴스


 

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49; 희극인 - 빌리 제임스 (Billy James)

일요시사 0 370 0 0

<1948년 1월 17일~1991년 8월 7일>



슬픔과 기쁨을 익살스럽게 풀어낸 ‘코미디 황제’


빌리 제임스는 늘 검은 운동복에 노란 수건을 목에 걸치고 

무대에 나타났다. 마치 동네 골목에서 마주칠 수 있는 

옆집 아저씨 같았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보는 자체만으로도 

익살이 철철 넘치는 콧수염은 많은 키위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웃을 일보다 울 일이 더 많다. 그래서 잠깐이라도 웃게 해 주는 코미디언이나 개그맨 같은 전문 직업인을 보며 위안을 받고 또 하루를 살아간다. 희극배우들의 익살스러운 몸짓이나 행동은 보는 이에게 ‘내일은 분명히 웃을 일이 생길 거야’ 하는 희망을 품게 한다. 설령 내일 또다시 울지라도 오늘만큼은 웃고 싶은 게 사람의 본마음이다.


어떤 사람의 말 한마디나 표정 하나에 세상 시름이 싹 잊힐 때가 있다. 찰리 채플린이 그랬고 이주일이 그랬다. 뉴질랜드에서는 빌리 제임스(윌리엄 타이토코, William Taitoko)가 그런 사람이었다.



스코틀랜드 피와 마오리 피 반반 섞여

 

빌리 제임스는 1948년 1월 17일 해밀턴에서 차로 30여 분 떨어져 있는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코틀랜드계 파케하와 원주민 마오리 두 문화가 뿌리째 이식되어 세상에 나왔다. 훗날 이 점은 그가 연예인으로서 성공하는 데 큰 자양분 역할을 했다.

 빌리 제임스는 열한 살까지 와이카토에 살면서 학교와 집에서 ‘연예인 끼’를 보여주었다. 기타를 뽐내며 치거나 몸을 흔들며 노래를 불렀다. 익살스러운 한 초등학교 어린이의 재롱은 동네 구경거리였다.

 그는 칼리지를 마치고 트럭운전사로, 상업예술가로 일했다. 그런 다음 군대에 갔지만 체질에 맞지 않았다. 자유분방한 성격은 늘 때맞춰 생활을 해야만 하는 군대에서 버티기 힘들었다. 세포 구석구석 숨어있던 '놀 끼'(놀고 싶은 마음)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군에서 나와 <마오리 화산들>(Maori Volcanics)이라는 밴드에 들어갔다. 영국과 미국, 호주를 넘나들면서 춤추고 노래하고 웃긴 얘기를 쏟아냈다. 호주 카바레에서 공연하다가 빌리 제임스로 이름을 바꿨다. 호주 사람들(오지, Aussie)이 이름을 쉽게 부를 수 있도록 하겠다는 배려였다.



1978년 올해 연예인 상 받아

 

그는 일레인 헤건(Elaine Hegan)이라는 에이전트를 만나 진가를 더 뽐낼 수 있었다. 뮤지컬과 코미디 부분에서 자기만의 틀을 확고히 다지며 1970년대 말까지 최고의 희극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1978년에는 ‘올해 연예인 상’을 받을 정도로 절정에 섰다.

 빌리 제임스가 브라운관에도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판단한 사람은 톰 파킨슨(Tom Parkinson)이었다. 그는 텔레비전 채널 2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인 <라디오 타임스>('Radio Times, 라디오 시절)를 빌리 제임스에게 맡겼다. 이 타고난 기질의 코미디언이라면 넉넉히 해 낼 수 있다고 믿었다. 기대만큼 <라디오 시절>은 수많은 키위에게 사랑을 받았다. 

 이 성공을 밑천으로 빌리 제임스는 또 다른 프로를 진행했다. 그의 이름을 딴 <빌리 제임스 쇼>였다.

 빌리 제임스는 갈래를 가르지 않고 훨훨 날아다녔다. 코미디 연극 노래 영화 만화…  뉴질랜드 연예계는 그의 세상이었다. 1981년 올해 연예대상, 1984년에는 ‘10년 동안 가장 훌륭한 연예인’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그는 늘 검은 운동복에 노란 수건을 목에 걸치고 무대에 나타났다. 마치 동네 골목에서 마주칠 수 있는 옆집 아저씨 같았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보는 자체만으로도 익살이 철철 넘치는 콧수염은 많은 키위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늘 웃기만 할 것 같은 그도 인종차별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보통 사람이 봤을 때는 큰 부담일 수 있었지만 빌리 제임스는 특별한 내색 없이 담담히 받아들였다. 어쩌면 마음속으로 삭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마오리들의 반감 불러일으키기도

 

빌리 제임스가 보여준 유머는 종종 마오리들에게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심지어는 총을 든 과격분자가 집을 찾아가 죽이겠다고 협박을 하기도 했다. 마오리를 웃음 소재로 삼아 비하한다는 이유였다. 

 그럴 때마다 빌리 제임스는 이렇게 말했다. 

 “내 몸속에는 마오리 피와 파케하 피가 반반씩 섞여 있다. 그 어느 쪽을 소재로 삼든 당연히 욕은 먹게 되어 있다.” 

 개그는 개그일 뿐, 큰 뜻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는 영화에도 출연했다. <케임 어 핫 프라이데이>(Came a Hot Friday)에서 타이누아 어린이 역을 맡았다. 자기가 멕시코 도적이라고 믿는 한 꼬마 이야기였다. 또 미국 쇼 프로그램 <엔터테인먼트 디스 위크>(Entertainment This Week)를 패러디한 <엔터테인먼트 댓 위크>(Entertainment That Week)로 큰 인기를 끌었다. 

 1987년 빌리 제임스는 만화에도 뛰어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만화를 좋아했던 그는 <빌리 제임스의 아메리카 컵>(Billy T James’ America’s Cup)이라는 연재만화를 그렸다. 또 텔레비전 만화 <풋롯 플래츠>(Footrot Flats)에서 더빙을 했으며, 책 두 권을 펴내기도 했다. 빌리 제임스가 펼칠 수 있는 영역은 무한대였다.


심장이식 수술 뒤 건강 크게 나빠져

 

1988년 어느 날 얄궂은 운명의 신이 그에게 다가왔다. 의사로부터 심장에 문제가 생겼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듬해 빌리 제임스는 뉴질랜드에서 열네 번째로 심장이식 수술을 받았다. 

 수술 뒤에도 연예활동을 왕성히 했다. 오랫동안 키위에게 웃음을 선사한 그는 그깟 병 때문에 시름에 잠겨 있지 않았다. 싫든 좋든 끊임없이 웃음을 만들어내고 사람들에게 ‘세상은 그래도 살 만하다’는 희망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빌리 제임스는 2년 동안 병을 극복하고 대중 연예인으로 최선을 다했다. 죽음이 그의 끼를 빼앗아 가기 전까지는….

 1991년 8월 7일 많은 키위와 함께 울고 웃었던 빌리 제임스는 마흔두 살을 일기로 저세상 사람이 됐다. 그가 40여 해를 살면서 큰 탈 없이 삶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웃으면(웃기면) 복이 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죽은 뒤 뉴질랜드 연예계는 대중의 우상이었던 빌리 제임스를 기리는 ‘빌리 제임스 상’을 만들었으며, 또 해마다 뉴질랜드 국제 코미디 페스티벌을 열고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는데 많은 키위는 보기만 해도 웃긴 빌리 제임스의 넉살스러운 콧수염을 지금도 그리워하고 있다.


글_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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