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99)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교민뉴스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99)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요한복음 11:25~27, 39~44>

예수님의 신적 자기 선언 다섯 번째 말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예수님의 일곱 번의 신적 자기 선언 그 모든 것을 딱 하나로 모으는 선언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부활과 생명은 하나입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기에, 예수님은 죽어도 살 수 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죽지 않습니다.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내 안에 모셔들이면,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나도 동일하게 소유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영원한 부활의 영광에 나도 함께 참여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말씀하신 예수님의 선언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야 하는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나의 믿음의 고백이 귀합니다. 


다른 사람의 고백이 아닙니다. 나의 고백이 중요합니다. 나의 고백이 가장 귀한 것입니다. 25절과 26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질문은 마르다를 향한 예수님의 자기 고백의 촉구입니다. “마르다야! 너 자신의 믿음의 고백을 해봐라.” 말씀하시는 거예요. 마르다는 27절에 자신의 신앙의 고백을 올려드립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의 고백을 언제 올려드렸나요? “나사로야! 나오라!” 나사로가 살아난 기적의 역사, 그 이후에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현재는 절망 중입니다. 지금 현재는 가능성이 없는 시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면, 메시야이시면, 나사로가 죽기 전에 오셨어야죠. 그러니까 마르다도, 마리아도 똑같이 말하잖아요.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겠나이다.” 인간적인 원망과 탄식이 담겨있습니다. 그럼에도 마르다는 다시 한 번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이제라도 예수님이 함께 계시니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주실 줄 믿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주님은 메시야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 나의 믿음의 고백입니다. 

  

나의 믿음의 고백이 귀합니다. 믿음의 인물들은, 신앙으로 살다간 인물들은, 누구나 한결같이 주를 향한 나의 신앙의 고백이 있었습니다.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죠. “내가 믿음의 길을 걸어갈 때에, 나를 붙잡아 주는 한 말씀이 있어야 한다. 내가 숨질때까지 부를 나의 찬송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끝까지 붙잡고 있을 나의 신앙의 고백이 있어야 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선포하시는 우리 주님 앞에, 나의 믿음의 고백을 올려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나의 확고한 믿음의 고백으로, 부활이요 생명되신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믿음의 고백에 합당한 삶은 더 귀합니다. 


나의 믿음의 고백에는 나의 신앙이 담겨집니다. 주를 향한 나의 믿음과 결단이 담겨집니다. 그렇기에 나의 믿음의 고백이 귀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귀한 것이 있으니, 나의 믿음의 고백에 합당한 삶의 흔적을 새겨가는 것입니다. 오늘 마르다는 예수님을 향해 위대한 믿음의 고백을 올려드립니다. “주는 그리스도오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제라도 주께서 구하시면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주실 줄 아나이다.” 마르다는 죽음으로 인한 절망에 빠진 중에서도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무덤 앞에 선 마르다를 보십시오. “돌을 옮겨 놓으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마르다는 대답합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안타까움으로 다시 말씀하십니다. 40절 말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리 하지 아니하였느냐?” 앞서 너의 믿음의 고백은 어디에 갔느냐?는 것입니다. 

  

이게 과연 마르다만의 모습일까요? 바울도 늘 가슴을 치며 고백합니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믿음의 고백은 있는데, 그 고백을 내 삶의 흔적으로 새겨나는 것이 쉽지 않은 거예요. 믿음의 고백대로 살아내기 힘겨워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무한한 영적 에너지가 담겨 있습니다. 선포되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이 시대의 슬픔은 말씀의 선포는 있지만, 그에 따른 역사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예전에는 말씀을 들으려면 주일에 교회에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휴대폰 한 번 딱 열면 전세계 각처의 모든 설교자들의 말씀을 다 들을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말씀의 홍수시대. 하지만 홍수에 물이 귀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넘쳐나는데 더 이상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요? 말씀이 상투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를 않는 거예요. 

  

나의 믿음의 고백이 귀합니다. 나아가 나의 믿음의 고백에 합당한 삶을 새겨가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귀합니다. 오늘도, 지금도,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고,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심령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할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은 오늘 본문의 시대에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받는 나의 심령,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내 삶의 걸음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나사로야 나오라!” 주의 능력의 말씀 앞에 믿음의 고백을 올려드릴 뿐만 아니라, 그 고백에 합당한 삶을 살아, 내 안에 부활과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강조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38절입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셨으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으셨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하나님의 뜻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향해서 예수님처럼, 예수님의 뜻을 행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본문 41절과 42절에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예수님은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그 뜻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구원을 향해 있었고, 나아가 구원 받은 믿음의 백성들 역시, 이제 우리를 보내신 예수님의 뜻을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게 그리스도인 된 우리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요,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현장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선포와 하나님의 초월적인 역사로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그럼 본문에 둘러선 무리들은 무엇을 했나요? 예수님의 기도에서 밝히신대로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메시야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죽기까지, 다시 사시기까지,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하나님의 뜻을 행한 예수님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예수님처럼 살아갈 때에, 예수님의 부활과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67f759b8e28a5e58f0123cbeb550c69c_1671573162_217322.jpg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