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흠의 아모르파티 21; 술 한 병과 빵 한 접시

교민뉴스

백동흠의 아모르파티 21; 술 한 병과 빵 한 접시

일요시사 0 743 0 0

냉장고를 열어보니 꽉 차있다. 새로 사온 음료수 한 병을 넣으려는데 웬 병들이 이리도 많은가. 우유 주스 참기름 소스 병… . 참 많기도 하다. 한 틈새 자리하나 뺄 수 있을까 하고 병들을 한 쪽으로 밀어 보았다. 다시 보니 어인 술병이 하나 있다. 막걸리 병이다. 윗물은 맑고 아랫물은 진하게 가라앉은 막걸리 병이 아직까지 있다. 몇 달 전 아는 분이 자기 집에서 담았다고 보내준 생 막걸리 술이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받을 때는 술 마실 여건이 아니어서 냉장고에 넣어둔 건데 너무 오래 놔둔 것이다. 보내준 분 성의도 있지, 아깝기도 하고 이건 좀 아니다 싶다.



그러고 보니 오래 전 아내가 한 말이 언뜻 생각난다. 평소 빵 굽는 것을 좋아하고 남들도 맛있게 잘 먹는 것을 흐뭇해하던 터에, 지난 번 빵을 구워서 한 접시씩 몇 집에 돌렸다고 했다. 정말 다들 잘 먹었을까 하고 아내가 혼잣말을 하였다. 그땐 잘 먹겠지 하고 쉽게 대답하고 넘어갔다. 이번 일을 보다 보니 막걸리 한 병이나 빵 한 접시를 주고받은 일에도 여러 경우가 있겠구나 생각이 든다. 빵 한 접시를 받고도 딸기 한 접시를 보내온 이도 있고, 잘 먹었다고 전화를 걸어온 이가 있더라는 아내의 이야기를 되뇌어 본다. 막걸리를 받아둔 채 잊어버린 것처럼, 빵 접시를 돌려주지 못하고 지나간 경우도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순 곡주 막걸리 한 병을 받을 땐 그 정성에 고맙다고 인사는 해놓고는 그 다음에 답장을 안했으니 준 사람이 좀 섭섭하지 않았을까. 신선할 때 맛있게 마시고 나서 며칠 뒤 전화 한번쯤 해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일마치고 출출하던 차에 잘 마셨다 라든가, 누가 와서 꺼내 놓으니 너무 좋았다고 말이다. 꼭 전화 한 통 받아서가 맛은 아니지만 사람 사는 정서가 이런데서 피어오를 것 같다.



탁구게임에선 이쪽에서 저쪽으로 공을 넘기면 되받아 넘겨준다. 주고받는 똑딱 핑퐁게임이 된다. 재미도 있고 신바람도 난다. 그런데 주고받는 일이 꼭 똑딱 핑퐁게임처럼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이메일 같은 게 그렇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보냈는데 답이 없을 수도 있다. 요즘 편리하게 주고받는 스마트폰의 카카오톡도 비슷하다. 유익한 정보나 좋은 글이라고 생각해서 주고 보내와도 서로 열어보지도 않은 채 있기도 한다. 탁구공과는 영 다른 반응이다. 그러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나 싶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할 때가 있다. 왜 그리 소식이 없을까, 마음에 안 드나 공감이 안가나, 여러 상상을 하기도 한다.


술이 몸에 안 받는 사람에겐 고급 양주 선물도 그리 크게 달갑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들이 다 내 마음 같지 않다는 걸 알게 되면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냥 선뜻 줄 수 없다. 필요한 사람에겐 약이 되지만 별 필요를 느끼지 못한 사람에게는 부담이 되기도 한다. 주려면 제대로 필요한 사람에게 주고, 일단 주고 나면 잊어 버려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내가 별로 필요하지 않은 걸 상대방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선물이라고 주는 경우가 문제다. 남에게 받은 선물인지, 내게는 별 소용이 없다고 느껴서인지 재포장하여 선물로 주는 걸 받을 때가 있다. 받는 쪽도 별 필요를 못 느껴 좋아하지는 않는다. 특히 연말 파티에서 선물 한 가지씩 준비해서 내놓았다가 다시 한 사람씩 골라갈 때 그런 물건이 있어 실망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술 한 병과 빵 한 접시 이야기가 여러 가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민 생활의 나이테가 깊어 갈수록 사람들 사이에서도 남아지는 게 있다. 진정으로 주고받는 마음이다. 그래서 한결 마음이 더 가는 사람이 있다. 밥을 함께 먹고 싶은 사람, 속을 털어 놓고 싶은 사람, 무슨 이야길 해도 다 들어주고 싶은 사람이다.



오늘은 오클랜드시 기념일(Auckland Anniversary)로 휴일이다. 멀리서 아는 부부가 찾아왔다. 이민 초기부터 한결같이 믿고 지내온 사이라 반가웠다. 함께 점심을 들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커피 한 잔 하려고 브라운스 베이 바닷가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구름 한 점 없는 전형적인 뉴질랜드의 한 여름 날씨다. 온 시민들이 바닷가로 다 놀러 나왔는지 휴양지 해변가처럼 붐빈다.



어린 꼬맹이부터 할아버지까지 오붓하게 즐기는 오클랜드 기념일이 한 폭의 여유 있는 풍경화다. 아이들은 물가에서 첨벙거리고, 연인들은 썬텐을 즐기고, 가족들은 텐트를 치고 즐겁게 정담을 나누고 있다. 수영에 요트에 윈드서핑까지 하는 젊은이들은 바다를 무대 삼아 각자 기량들을 최대한 펼치고 있다. 갈매기들도 바다 위에서 맘껏 활개를 치며 날아다닌다. 바람 따라 세 시간이 또 어느새 흘러갔다. 그동안 각자의 생활 이야기와 아이들 이야기에 앞으로의 일들까지 좋은 그림을 함께 그렸다. 그러다 보니 와인 병과 빵 접시도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





작가 백동흠 

수필 등단: 2015년 에세이문학. 소설등단: 2015년 문학의 봄

수필집: 아내의 뜰(2021년). Heavens 지금여기(2022년).

수상: 2017년 제 19회 재외동포문학상 수필 대상 (깬니프!).

     2022년 제 40회 현대수필문학상 (Heavens 지금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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