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여행

손바닥소설


 

겨울 여행

오문회 0 1778
기찬 빗소리, 흘러내리는 물줄기에 생각이 소용돌이친다. 올해 따라 유난히도 길고 긴 뉴질랜드의 겨울이 늘 비에 젖어 있다. 오클랜드 도심공원의 비탈진 산허리, 열두 굽이 작고 좁은 길이 무성한 숲에 쌓여 있다. 그 산허리를 따라 운전하며 천천히 내려오는데, 쏟아지는 폭우가 도랑물을 이뤄 세차게 넘쳐흐른다. 택시 지붕 위로 “후드 둑… 후드 둑…” 떨어지다 급기야는 “쏴아!” 하고 쏟아 붓는다. 이러다 다 씻겨 내려가는 건 아닐까. 도로 위의 흙먼지와 쓰레기는 말할 것도 없다. 생각 속에 머문 갈등의 알갱이들도 깨끗하게 쓸려 내려간다. 치유의 씻김굿처럼 개운한 맛이다.

옛날 동심의 청개구리가 내 기억 속으로 폴짝 뛰어 든다. 무엇이든 시키면 반대로만 하는 아들 청개구리였다. 산에 묻지 않고 냇가에 묻을까 봐 냇가에 묻으라 했다. 엄마 죽고서야 청개구리는 철이 들었다. 엄마 말을 따른다고 냇가에 엄마를 묻어놓고 비만 오면 목청껏 울어댄다. “개골개골, 우리 엄니!” 엄마 무덤 떠내려갈까 봐 그리도 슬피 울고 또 운다. “개골개골, 우리 엄니!” 하늘이 몹시도 질펀하게 우는 날이면 어김없이 파고드는 청개구리 생각에 왜 이리 가슴이 뛰는지. 메마른 활처럼 등이 휜 고국의 팔순 어머니!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 시골 고향집 마루 문턱에 앉아 대문 밖을 응시하고 계시지는 않는지….

시 일을 일찍 시작하기 위해 일어나는 새벽 녘, 알람이 울리기 직전에 눈이 떠진다. 간밤의 빗소리 때문일까.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태곳적 장단으로 울려온다. 하늘의 음악 소리이다. 느낌이 참 편안하다. 일어나지 않아도 눈이 아닌 귀로 들을 수 있는 저 빗소리는 얼마 만인가. 이불 속에서 듣는 음악소리. 창밖은 아직도 어두운데 하늘이 내려준 천상의 소리에 젖어 그대로 누워있는 시간이 참 아늑하다. 옆에 누워 자고 있는 줄만 알았던 아내가 그때 나직하게 한마디 한다. “빗소리 참 좋아.” 일어서면 귀로 듣는 소리의 즐거움이 달아날까 봐 가만히 누워 듣는다. 온 신경을 귀로 모은다. 온 몸으로 듣는다. 내 마음과 몸이 비에 젖어 든다. “후드 둑… 후드 둑… 후드 득…” 그 옛날 시골집에서 듣는 빗소리다.

햇살 따사로운 지난 달, 집 단장을 하던 중 며칠간 지붕에 앉아 페인트칠을 했다. 푸른 하늘을 머리에 이고 지붕 위에 앉아 말없이 페인트칠을 하다 보니 자신만의 세계에 몰두한 시간이었던가 싶다. 깔끔하면서도 맑은 빗소리가 새로 칠한 그 지붕위로 떨어지고 있다. 저 단아한 소리를 들으려고 고생해 가며 지붕을 물청소하고 페인트칠했던가. 온 몸과 맘으로 조심스레 발 디디고 다니며 페인트칠한 기와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새로운 줄로 바꾸고 튜닝한 바이올린 소리처럼 청아하고 명징하다. 일하고 난 뒤 느끼는 보람과 함께 깔끔한 여운도 흐른다.

유난스레 많은 비가 인내를 시험하듯 오랫동안 내렸다. 겨울 끝자락, 전국을 강타한 태풍은 택시 운전하는 내내 차를 날려버릴 듯 거세고 매서웠다. 아무리 과학 물질문명이 발달되었다 해도 자연의 힘 앞에서는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인간의 한계를 확인시켜준 겨울이었다. 그렇게 겨울은 지나가는가? 손님이 건네준 인사말에 봄이 실려 온 듯싶다. Winter is on its last legs. 직설적인 말보다 이런 비유적 표현에서 운치와 여유감이 느껴진다.

울이 물러가고 봄이 오는 길목이니 기대도 되고 희망도 움튼다. 봄이 저만치 성큼 다가오는가 싶었는데, 봄의 전령사로 다가왔던 목련과 수선화는 비바람에 혹독한 신고식을 치르다가 날아가고 쓰러졌다. 한 겨울 끝자락에 있는 듯 없는 듯 향기 내 품는 천리향도 움츠러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가까스로 후리지아가 마지막 주자로 섰다. 꽃대를 살포시 들어 올리니 하늘 바람이 꽃대를 몇 번 흔들어 댔다. 그러자 노란 환호성 물결이 춤을 추며 꽃내음을 발산하였다. 노란색 빨강색 보라색 후리지아 꽃 봉우리에 맺혀있는 진주알 빗방울 풍경이 햇살에 투명하게 빛났다.

긴긴 겨울비에 택시 안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이따금 기지개 켜기도 수월치 않았던 시간들이 한때는 따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세상으로 떠나는 대장정을 감행했다.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탈 행위에 몰입하게 된 것이다. 이름 하여 겨울 여행이다. 책 속으로의 여행! 현대에서 고전으로, 서양에서 동양으로, 기독교에서 불교로, 시에서 소설로, 역사 속에서 자연 속으로, 시공을 초월하는 여행이었다. 책을 잡으니 현인들이 넓이와 깊이를 가늠시켜 줬다. 한편의 소설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니 소설 속의 인물이 되어 버렸다. 주인공의 행동과 감정 변화에 흠씬 빠졌다. 웃는 얼굴이 아름답고 따뜻한 사람, 티베트 인들이 뭉클하게 다가왔다. 인도에서 동쪽 중국으로 끌려간 푸른 눈의 승려, 쿠마라지바의 번뇌가 가슴을 아리게 했다. 봄을 찾는다고 세상을 돌아다니다 지쳐 돌아오지 않았던가.



아와 보면 집 앞뜰에 후리지아 꽃이 그윽한 향기 내품으며 피어있다. 세상에 아름다운 보석은 거기가 아닌 여기에도 있음을 속삭여 줬다. 자신이 좋아하는 큰 일 하나를 하기 위해서, 마음에 선뜻 내키지 않은 작은 일 열 가지를 하는 게 인생이라고 한다. 그러기엔 으레 감수해야 할 불편한 일 열 가지 작은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겨울나기다. 그리고서야 봄을 맞이하게 된다. 인생도 마찬가지인가 싶다. 빗속에서 책을 통해 겨울을 나는 것이다.

명예와 부를 손안에 잡는 것만이 성공은 아니다. 나이 들수록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점점 더 나를 좋아하는 것이 행복이다. 어려울 때도 함께 하며 동행하는 마음이 있는 곳에 소박한 평화가 흐른다. 비바람 속이건 고단함 속이건 함께 있음에 편안함이 느껴진다. 이민 생활하며 만나는 이웃 그리고 바늘 실과 같은 가족, 당신들이 옆에 있어 그저 고맙다.

*저자 백동흠( 뉴질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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