덤 앤 더머

손바닥소설


 

덤 앤 더머

오문회 0 1438
'KBS 전국노래자랑'은 남편과 내가 즐겨보는 TV 프로그램이다. 출연자의 노래가 시작되면 화면 아래에는 그 사람의 이름과 나이, 그리고 직업이 간략히 소개된다. 남편은 자기 또래의 사내가 나오면 놀란 표정으로 나에게 묻곤 한다.

"나도 저 사람만큼 늙어 보이나?" 그의 목소리가 무겁다. 나는 얼른,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해 준다. 그의 눈가에 자글자글한 주름과 입가에 팬 팔자 주름, 그리고 이마를 박차고 올라간 M자형 탈모를 보면서도 대답은 그렇게 한다.

얼굴에 마음이 쓰이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사진을 찍는 게 부담스럽고, 사진 속 내 얼굴이 낯설다. 내가 아닌 것 같다고, 잘못 나온 것 같다고 투덜대면, 사진은 나를 빤히 쳐다보며 '우리는 인간들처럼 누굴 속이는 그런 짓은 안 합니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내가 정말 이렇게 생겼나 싶어 거울을 본다. 어! 머리 밑이 휑하다. 특히 정수리 부분은 누가 작정하고 왕창 뽑아간 것 같다. 사진을 보며 기가 죽고 거울 앞에서 다시 한풀 꺾인다.  

외모만 그런 게 아니다. 매일 먹어야 할 약이 몇 가지 있는데, 올해부터는 한 가지 약이 또 추가되었다. 눈에 황반변성이 오기 시작했으니 눈 영양제도 먹어야 한단다. 이 약들을 나는 대개 한입에 털어 넣는데, 문제는 오늘 아침에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한 달치 약이 들어 있는 약병을 쏟아 붓고 몇 개가 남았는지 헤아려 본다. 그래야 판정이 난다. 

휴대폰 화면의 메일 난에 뜬 숫자 11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한다. 언제 이렇게 많은 메일이 와 있나 싶어서. 실은 숫자 1이 겹쳐 보이면서 11로 보인 것이다. 내 기억도 내 눈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어깨가 다 드러나는 '반짝이 원피스' 한번 못 입어 본 채, 나는 확실히 '중고'가 되었다. 

남편의 상태도 나와 비슷하다. 어느 날 지하철을 탔는데 맞은편에 대학 은사님이 앉아 신문을 보고 계시더라고 했다. 대학 다닐 때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인데 거의 십 년 만에 뵙게 되니 무척 반가웠다고 했다. 그런데 교수님의 존함이 도통 기억나질 않았다. 

성씨라도 기억해 보려고 ㄱ, ㄴ, ㄷ에서 ㅊ,ㅎ까지 가 봤지만 소용없었고, 그러는 사이 교수님은 지하철을 내리셨다. 그냥 "교수님!"하며 인사드렸으면 될 것을.

기억력이 이젠 우리 부부의 식탁까지 뒤흔들고 있다. 어느 날, 저녁상에 잘 익은 총각김치를 올렸다. 그런데 남편이 한 입 베어 먹은 뒤 그걸 김치 그릇에 도로 얹어 놓았다. 베어 문 자리에 남편의 잇자국이 뚜렷했다. 나는 밥을 먹는 동안 '이 사람이 왜 저걸 그대로 두나, 마저 먹어 치우지' 했지만 그는 다른 반찬만 먹었다. 그의 밥그릇에 밥이 딱 한 숟가락 남았다. '이번에 안 먹기만 해 봐라' 하고 벼르고 있는데, 그의 젓가락이 시금치나물로 갔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총각김치를 왜 먹다 말아요? 드럽게 잇자국을 내놓고!"  그러자 그가 발끈하면서 자기도 줄곧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그 총각김치는 당신이 먹다가 거기 놓았을 거라며, 깔끔한 자신이 절대 그랬을 리가 없다고 했다. 나는 내 기억이 맞다고 했고 그는 당신이 범인이라며 빡빡 우겼다. 식탁 위에 CCTV가 없는 한, 앞으로도 우리는 이런 문제로 티격태격할 게 분명하다. 

오늘 저녁에도 한참 얘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통화를 마친 남편이 돌아와 아까 하던 얘기를 마저 하자고 했다. 그런데 무슨 얘기까지 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모자라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힘을 합해야 살 수 있다. 기억력이 약하고, 판단이 느리고, 몸까지 부실해져가는 우리 부부는 이제 단합하는 수밖에 없다. 

저자 정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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