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를 스캔하다

손바닥소설


 

남자를 스캔하다

오문회 0 1379
그 집 앞을 지나갈 땐 걸음이 한 박자 느려진다. 맑은 물방울이 하얀 꽃잎 위로 떨어지듯 가슴이 스타카토로 뛴다. 시들한 골목길에 오래된 집 한 채를 고치느라 며칠 뚝딱뚝딱 망치 소리가 들렸다. 별 생각 없이 지나쳤는데 어느 날 목공예 공방이 생기고 외벽에 싱그러운 아이비 화분 이 걸렸다. 그 집 앞을 지나는 아침, 푸드덕 잠을 깬 공기에서 박하 향이 난다. 

 스무 살 무렵 하늘색 우산을 쓰고 어느 집 앞을 지나가던 때도 가슴은 뛰는데 걸음은 느려졌다. 담장 너머로 채 벙글지 않은 목련꽃이 기웃거려 꽃에 눈을 두었던가, 꽃송이 사이로 보이는 창 언저리를 엿보았던가. 노랗게 떨어진 감꽃을 밟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피하는 척 걸음을 늦췄던가.

 가슴 울렁거리게 하던 그 남자네 집 창에 어느 날 조롱박 넝쿨이 오르더니 하얀 박꽃이 피었다. 꽃이 지고 조롱박이 열렸다. 내 마음속 꽃도 따라서 피고 졌다. 그 사람이 달아놓은 박에서 푸른 종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창가에 조롱박을 키울 생각을 하다니, 그런 생각을 하다니. 그 사람은 내 마음을 받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인정했다. 오랜만에 떠올리는 기억이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는 무디어져 있었고, 살아가는 데 박하 향이나 푸른 종소리 같은 건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아버렸으므로…….

 저녁마다 공방에선 불빛이 흘러나온다. 싸늘한 골목이 홍시 빛으로 아늑해진다. 휘몰아서 하루를 보낸 발걸음이 느슨해진다. 발목을 휘감는 불빛이 오늘도 애썼다고 내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 같다. 누굴까, 내 발끝에 불빛을 풀어놓은 사람이. 지날 때마다 나무 향이 훅 끼치는 공방을 흘끔거린다. 긴 다리를 세운 뽀얀 탁자가 기품 있는 남자처럼 앉아 있다. 따뜻한 불빛을 품은 나무 스탠드는 마치 사색하는 남자 옆에 조용히 앉아 있는 한 마리 달마시안 같다. 

 공방 안 어디에 그 남자가 있을까. 톱질을 하고 망치를 드는 건강한 팔뚝을 가진 남자, 섬세한 감각으로 나무에 숨을 불어 넣는 남자. 백아가 되어 종자기를 찾는다는 광고라도 내는 듯 ‘지음’이라는 이름을 지어 간판을 내건 남자. 자기의 작품을 알아봐 줄 속 깊은 벗을 찾고 있을 그 남자. 마음속 샘물 위로 설렘이 버드나무 잎처럼 떨어진다. 자잘한 파문이 인다. 

 몇 달이 지나도록 그 남자 얼굴을 본 적은 없다. 혹시 공방 주인이 여자일지도 모른다. 직업에 남녀 구별이 없어진 요즘 주인이 남자일 것이라는 생각은 남자이기를 바라는 내 마음 때문일 수도 있다. 잊고 있었던 푸른 종소리를 좀 더 붙잡으려고, 꿈같은 남자를 그리며 그 집 앞을 오가는 얄궂은 심사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마음먹고 걸음을 멈췄다. 공방 안 불빛 속에 공구들이 보인다. 이름도 모르는 공구들이 나뭇결 속으로 잦아든 바람을 읽다가 작업실 벽에 몸을 기댄 채 졸고 있다. 

 살금살금 공방 안 더 깊이 더듬이를 뻗는다. 나무 조각이 흩어져 있고 컵라면 그릇과 종이컵이 앉아 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의 작업실엔 푸른 종소리도 박하 향도 없는 듯하다. 기품 있는 남자와 달마시안도 보이지 않는다. ‘지음’은 종자기를 찾는다는 광고가 아닌 단지 ‘짓다’의 명사형으로 지은 이름일 것이라고 생각이 기운다. 그래, 집을 짓고 가구를 짓고 아이들을 품어 키울 가정을 지어야겠지.

 그때 그 남자는 지금도 창가에 조롱박 넝쿨을 올리는지, 그 남자 가슴속에서 가끔 하얀 박꽃이 피고 지는지. 아니면 그 기억조차 잊은 채 어두워진 시간까지 끝내지 못한 일을 하고, 소주 한 잔에 공허한 웃음을 날리며 지친 하루를 닫는 그저 그런 아저씨로 살아갈 수도 있겠다. 꼭 그런 남자만 있는 것은 아니지. 가끔 여행을 하고,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운동을 하며 알뜰하게 사는지도 모르지. 공방 앞에서 스무 살 무렵 남자를 생각을 하며 서 있다.

 아, 공방 작업실 안에 그 남자가 보인다. 시간도 이젠 지쳐 몸을 누이려고 하는데, 그런 줄도 모르고 작업대에 엎드려 있는 남자, 불빛이 젖은 어깨 위에 잠시 눈이 머물다 미끄러진다. 

 눈길도 알아채지 못하는 남자, 아무것도 모르는 그 남자, 아무것도 모르는 낡은 작업복 속 엉덩이. 

       
 저자  한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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