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흠 칼럼; 저녁을 짓는다

손바닥소설


 

백동흠 칼럼; 저녁을 짓는다

일요시사 0 1336

학교 수업을 마칠 때 픽업을 하면서 낯이 익은 Robert. 오늘은 왠지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이제 겨우 8세 소년 아이. 수업까지 마치고 집에 가는 시간이라 전처럼 밝은 얼굴을 기대했는데, 오히려 내가 눈치를 흘끔 보고 있다.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도 무슨 고민이 있긴 한 모양이다. 숙제가 많은 것도 아닐 테고, 학교에서 친구들과 다투기라도 했나? 아니면 선생님께 꾸중이라도 들었던 걸까? 기분 전환 겸 알사탕을 하나 주면서 말을 해봐도, 그저 말없이 받아 입에 넣기만 할 뿐 묵묵 부답이다. 창 밖만을 무심코 내다볼 뿐이다.

 

철학자가 된 꼬마 손님을 모시고 나 역시 침묵 모드로 운전을 한다. 택시 안 공기가 사뭇 어색하다. 옆 좌석에 앉은 아이를 한번씩 곁눈질 하면서 편안하게 마음을 다잡으려 애를 쓴다. 아이에게 오늘은 무슨 날일까? 아이 집을 향해 한 참을 달리고 있는데 아이가 갑작스레 말을 건네온다.

“아저씨! 잠깐만요. 차를 돌려주세요. 반대로요.

Robert? 목적지가 이쪽 Westharbour 맞잖아. 이 주소로 픽업하라고 들었는데”

 

길 옆에 차를 세우며 묻자, 아이의 얼굴이 금세 빨개지며 당황한 빛이다. “엄마한테 가고 싶어요”

“집에 가면 엄마 만나잖아?

“엄마가 둘 이에요”

 

, 무슨 소리지? 오히려 당황한 나에게 Robert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인다.

Oratia 엄마한테 가고 싶어요”

어린 사슴 같은 간절한 눈 빛! 눈물이라도 한 방울 뚝 떨어뜨릴 것 같은 머루알을 쳐다보다가 할 말을 잊는다. 세상에나, 그게 어린 것의 고민이었구나. 아빠가 엄마와 헤어지고 새엄마와 살면서 아빠는 하나라서 별 문제 없는데, 엄마가 둘이라서 문제란다. 보고 싶은 엄마는 못 만나고 새 엄마는 왠지 싫단다. 엄마가 둘이라아빠 사는 집이 크고 새 집이라 편리하기는 하지만 그 어린애 마음에는 그게 다가 아니다. 어딘가 채워지지 않은 빈 공간에 엄마의 정이 그리운 것이다.

 

지난번 학교 픽업 시간에 갔다가 허탕친 일이 떠올랐다. 이제야 이해가 갔다. 친구와 ‘엄마’ 얘기로 싸우다 그만 친구 코피를 터뜨리게 했단다. 선생님은 아이 아빠가 올 때가지 아이를 집에 보내주지 않고, 택시 부른 것을 그만 취소해 버렸던 것이다. 막 자라나는 어린 가슴에 사소한 말 한마디도 가시가 되어 불쑥 과격한 행동으로 돌출되어 나오니 문제가 커질 뿐이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진 아빠 집에서 살고 이따금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주말에 친 엄마 집에 들르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온전한 해결책이 될 수 없어 보인다. 아이는 Oratia 엄마한테 가게 해달라고 떼를 쓴다. 이럴 땐 참 황당하다. 택시 부른 건 아이 아빠라 사정 변경 시 동의가 필요해 아이아빠와 통화를 해보니, 대답은 역시 Westharbour 아빠 집으로 가란다. 아이가 바꿔 달래서 휴대폰을 아이에게 주니 아이가 그만 으앙! 하고 울어 대면서 용을 쓴다. Oratia로 가게 해달란다. 아프단다. 어디가 아픈지 모른단다. 급기야, 울부짖는다.

 

한참 동안, 아이 아빠가 말을 못하고 정적이 흐른다. 일하다 말고, 떼를 쓰는 아이 전화 받는 아빠 얼굴이 선하게 그려진다. 잠시 후, 아이 아빠가 나를 찾는다.

다시 전화를 받아 보니, 이번 주말은 가족 나들이 계획이 있어 안 된다고 하는데도, 아이가 그렇게 막무가내니 오늘은 Oratia로 데려다 주라고 아이 요구를 승낙해 준다. 목소리에 힘이 쭉 빠진 채 허전한 느낌이 배어 있다.

 

Oratia, 아이 친 엄마 집은 숲 속 삼림지역으로 잘 알려진 서쪽 Scenic Drive 부근 이다. 집은 다소 허름하지만 주변 숲이 정서적으론 편안하게 보여 아늑하다. 우거진 숲 속 굽이 굽이 산허리를 돌아 내리막 오르막을 달리다 보니, 마치 고국의 강원도 어느 산골을 운전하는 기분이다. 온갖 새소리와 계곡 얕은 물소리도 들리는, 아이 친 엄마 집 앞에 Robert를 내려놓으니, 갇혔던 새가 새장을 푸드득거리며 빠져 날아가듯 날쌔게 오르막 집으로 내 달음질 친다.

 

새 엄마와 살면서는 보이지 않은 창살, 새장 속에 갇혀 살기라도 했던 걸까? 세상이 아무리 편리하고 풍요롭다고 한들, 그 보이는 어떤 것들로도 채울 수 없는 게 있으니 우리들 마음속의 고향, 어머니의 정인가 싶다. 어디에 가도 변함없이 우리 가슴 속 깊이 자리잡은 어머니의 사랑은 자연이자 회귀처다.

 

이스라엘에 있는 갈릴리 호수와 사해의 이야기가 교차되어 떠오른다. 여러 곳의 물을 받아들여 생명력 넘치는 바다 같은 호수를 이루고, 그 맑은 물을 요단강으로 흘려 보내는 갈릴리 호수는 주고 받고가 잘 되는 터전이라고한다. 당연히 그곳엔 풍성한 자연 기운이 있어 물고기와 여러 생물들이 잘 서식하고 유용한 물로도 쓰이게 될 수밖에. 반면 사해는 물이 들어 오기만하고 나가지를 못해 증발만 할 뿐이라, 절여진 소금기운과 중금속 광물질이 녹아나 생물이 살지 못하고 어디에도 쓸 수가 없게 되어 죽은 바다가 되어 버렸다는 이야기.

 

엄마의 품이란 게 바로 이 갈릴리 호수 같은 터전이 아닐까. 엄마의 깊고도 넓은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는 갈릴리 호수처럼 생명력이 넘친다. 트인 사랑, 주고 받는 사랑, 그건 함께 나누며 사는 아름다운 세상의 초석이다. 엄마 사랑 안에서 자란 아이는 그 엄마를 닮아 사랑의 흐름 줄기가 되어 간다. 반면 막힌 사랑, 받기만 하는 사랑은 어떤가. 이기적일 수 밖에 없고, 독선적이며 함께 살기가 힘들 수 밖에 없다. 아이를 낳아 잘 보살펴 길러주는 한결 같은 어머니의 사랑은 갈릴리 호수 같은 사랑일 테지만, 잘못된 인연으로 편협하게 길러주기만 하는 새 엄마의 사랑은 자칫 사해 같은 사랑으로 막힐 수도 있다.

 

세상에는 수 많은 이들이 오늘 이 시간에도, 세계 각처에서 사랑을 나누며, 영원히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결혼을 하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두 쌍이 결혼하는 사이에 한 쌍이 갈라선다는 것이다. 가정이 깨어질 때 단지 부부 문제로 끝나는 게 아니고 죄 없는 아이들이 가장 큰 피해자란 것을 알면서도 당사자들은 그만 사해 속에 갇혀버린다. 자기 주장과 고집에 매어 상대 잘못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기다려주는 여유가 없어 관계를 단절시켜 버리니, 애꿎은 아이들도 사해 속에 빠져버리고 만다.

 

이혼이란 뭘까. ‘엄마가 둘 이에요?’ ‘아빠가 둘 이에요?이혼은 어쩌면 매일 밤 부부 사이에 누워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하나라서 문제 없는데 엄마는 둘이라서 문제인 것'… . 문정희 씨의 <남편> 이야기가 오늘따라 왠지 남의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 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 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  

0 Comments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