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인터 신동우
페인터를 하다 보면 의외로 사람 사는 냄새가 느껴지는 일이 많다. 고생한다며 빵과 커피를 내어주는 분이 있는가 하면, 15년간 모은 쌈짓돈으로 실내 페인팅을 하곤 소녀처럼 해맑게 좋아하던 할머니, 한때는 6.25 참전용사를 만나는 일도 있었고, 반가운 88올림픽 자원봉사자과 인연을 맺는 일도 있었다. 이럴 때면 단순히 페인터로서의 작업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인생도 함께 덧입히고 있음을 느끼곤 한단다.
페인터 신동우 씨는 지난 2009년 가족과 함께 뉴질랜드에 도착했다. 한때 용접과 타투를 배워 업으로 삼고자 했지만 당시 영주원을 따기 위해선 부족직업군인 제과 제빵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주권을 획득한 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렇게 자연스레 다른 일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 다름아닌 페인터. 평소 흥미롭게 생각하던 직업 중 하나였다.
“현장일이 모두 힘들도 고되지만 특히 페인팅은 적성에 맞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돈은 많지만 집에서 노느니 나와서 일한다는 분, 먹고 살려는데 페인트가 제일 쉬워 보여서 배워보고 싶다는 분, 크게 두 가지 이유로 페인터란 직업을 시작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이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제 경험상 지치고 힘듦을 즐기면서 페인팅에 대한 스트레스조차 즐겼던 분들은 지금 모두 A급의 위치에 계십니다. 샌딩 한 면, 컷팅 한 줄, 롤링 한 면에 모두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있는 분들입니다.”
이제야 그는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고 사뿐히 날아다니는 기분이란다. 그렇기에 즐기면서 일할 수 있는 진정한 프로 페인터로 거듭날 수 있었을 터. 한때는 사업 확장에 욕심을 내어 세네 곳의 현장을 동시에 운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승승장구할 거란 기대와 달리 그 결과는 예상밖의 결과를 낳았다.
“여러 곳에 신경을 쓰다 보니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업 마무리가 지속되었습니다. 잠자리에 들려다가도 다시 일어나 현장으로 달려가 작업 라이트를 켜고 재작업하기를 수차례. 제 욕심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 이후 ‘그래, 돈 욕심에 내 스스로에게 창피하지 말자’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했죠.”
책임감과 프로의식을 잃지 않기 위해 다짐을 하며 일한 세월이 어느덧 10여년. 그에 대한 보상일까. 어느 날 그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4년 전 작업을 의뢰했던 고객과의 인연으로 타카푸나에 위치한 리타이어먼트 1200채를 관리하는 페인터가 된 것이다. 당시 250달러의 아주 작은 규모의 작업이었지만 최선을 다한 그에게 주어지는 보상이었다.
“처음 250불짜리 작업으로 시작해 지금은 무려 1200채의 플라스터링과 페인팅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고급 리타이어먼트 빌리지의 특성상 만만치 않은 인스펙션 때문에 하루 아침에 쫓겨나는 다른 컨트렉터들을 보았을 때 마음 고생도 많았지만 지금은 내집보다 편한 현장이 되었습니다. 어르신들의 마지막 안식처가 되는 곳이기에 조금이라도 더 깔끔하고 예쁜 작업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살았던 세월의 보상과 더불어 즐기면서 일을 하는 마음가짐이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까지 만든 듯하다. 자연스레 고객들과 정을 나누고 그들의 인생 속에 한걸음 들여놓게 되는 순간들도 찾아왔다.
“인터뷰 제의를 받고 제일 먼저 생각나는 분이 12년간 못 뵌 어머니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르신들이 사시는 집은 왠지 마음이 더 갔고, 4년째 일하고 있는 리타이어먼트 빌리지의 어르신들을 매일 뵐 때 마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와 이민 후 한번도 못 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현재 그는 관리하고 있는 작업 외에도 또 다른 규모있는 작업을 앞두고 있다. 늘 그래왔듯 서두르지 않고 바쁠 때일수록 꼼꼼히 하자는 마음가짐을 갖고 일에 임할 계획이란다.
“앞으로 규모가 좀 있는 공사 계획이 있습니다. 절대 서두르지 말고 바쁠수록 더 침착히 꼼꼼히 하자는 마음으로 늘 열심히 임하겠습니다. 지금처럼 도와주시는 분들과 하루하루 바쁘고 즐겁게 일할 것입니다.”
글 박성인 기자
사진제공 신동우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