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KEN)농장 임근규 대표
일요시사는 창간 10주년을 맞아 ‘뉴질랜드 이민 열전’을 싣는다. 뉴질랜드 이민 역사에서 10년 이상 한 길을 걸어온 사람 가운데 뒷세대에게 기록을 남겨도 좋을 만한 사람을 선정했다. 그 공과(功過)는 보는 사람에 따라 충분히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기록을 통해 뉴질랜드 이민사가 새로운 시각에서읽히기를 바란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믿는다. <편집자>
그에게서는 진한 사람 냄새, 흙냄새가 난다
택시 기사 등 숱한 직업 거친 뒤 농사꾼으로 정착…
한때 소 2백 마리 가깝게 키워
집에 들어서자 사진 한 장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더벅머리 사내 둘, 앳된 계집애 셋. 솔직히 너무 수수해 조금은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다. 늦가을에 찍은 것일까. 투명한 햇살이 곱게 다가온다. 아이들 표정이 너나없이 싱그럽다. 잘 차려입지는 않았지만 자연이 빚은 배경이 사진을 더 돋보이게 해준다. 같은 씨를 받아 같은 밭에서 태어난 다섯 형제, 그들은 흙의 아이들이다.
그의 집에는 (기념)사진이 많이 걸려 있다. 결혼사진, 아이들 돌사진, 어머니 잔치사진……. 액자에 넣은 사진, 코팅된 사진, 빛바랜 사진……. 족히 백 장은 넘어 보이는 갖가지 사진이 벽에 촘촘히 붙어 있다. 벽 한 면을 가득 차지하고 있는 사진을 통해 그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그 어느 한때의 추억, 혹은 살아온 흔적.
“내 삶의 기록이지요. 내가 어떻게 살아왔다는 그런 것 말입니다.”
만나자마자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 요청
임근규를 처음 만난 날, 나는 그에게서 진한 흙냄새를 맡았다. 예의상 손님을 맞기 위해 몸을 씻었다고는 했지만 숨길 수 없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태곳적 자연의 냄새, 흙냄새였다. 투박한 얼굴에서도, 거친 몸짓에서도, 뭉툭한 작업 신발에서도 느껴졌다. 피할 수 없는 냄새에 나는 천천히 취해갔다. 그리고 살 맛 풍기는 사람 냄새에.
‘뉴질랜드 이민 열전’을 계획했을 때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른 사람이 캔농장 대표 임근규 씨였다. 나는 평소 그와 일면식도 없었다. 그저 교민 매체 광고를 통해 그가 어떤 일을 하는지 짐작으로만 알 수 있었을 뿐이었다. 본능적으로 그에게서 진솔한 얘기가 많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까칠한 돈 얘기 말고 사람 사는 풋풋한 얘기 말이다.
첫날 우리는 네 시간을 함께 있었다. 어느 정도 맘이 편해져 내가 녹음을 하려 하자 그는 ‘오프 더 레코드’(Off the record, 비보도를 조건으로 얘기하는 것)를 요청했다. 그냥 자기 얘기만 들어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녹음 버튼을 ‘시작’에서 ‘정지’로 바꿨다. 그러자 그의 입이 서서히 열렸다.
두 주 뒤, 다시 그를 만났다. 오클랜드 시내에서 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헬렌스빌 그의 농장에서였다. 그는 경운기를 몰고 있었다. 노지에 심은 무를 뽑아 트럭으로 옮기는 중이었다. 사내아이 머리통보다 큰 무들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내가 인사를 하며 다가서자 그는 웃음을 건넸다.
“아, 우째 날 그리 쫓아다닌디야~~”
전라도 고향 사투리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그의 말투에서 두고 온 내 고국의 흙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우리는 다섯 차례에 걸쳐 시간을 함께 했다. 집에서, 일터에서, 가게에서, 그리고 교민 식당에서 얘기를 나눴다. 그는 한 시도 쉬지 않고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여가며 듣고 또 들었다. 그의 파란만장한 오십 여년을 이제 조심스럽게 풀어보려고 한다.
전남 영암에서 소작농 아들로 태어나
임근규는 1961년 전라남도 영암에서 태어났다. 전형적인 시골 농촌이었다. 원래 집안은 대대로 부자였다. 그러나 권력 있는 사람들에게 사기를 당해 집안이 어려움에 부닥쳤다. 급기야 아버지 대에는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어린 근규는 헛간에서 잠을 자야 하는 형편에까지 이르렀다.
십 대 말, 아버지가 고혈압으로 돌아가셨다. 자연스럽게 그는 소년 가장이 됐다. 그 뒤 그는 글로 풀기 힘든 숱한 고생을 했다. 다행히 그 고생은 훗날 성공의 씨앗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는 비료로 활용됐다.
그는 한때 택시 운전을 했다. 고향 영암과 인근 대도시 광주에서 핸들을 잡았다. 어느 날 한 손님을 태웠다. 중년 남자였다. 그 손님이 느닷없이 이런 제안을 했다.
“자네, 농사 한 번 져 볼랑가?”
임근규는 땅을 살 여력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손님이 대신 사 주겠다며 “자네는 딱 봐도 농사꾼 체질”이라고 추켜 세웠다. 그 말을 믿고 젊은 나이에 농사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해 가을, 그는 950만 원을 벌었다. 당시 차 한 대 값이 80만 원도 안 될 때였으니까, 수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989년 그 돈을 밑천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자기 이름으로 된 논 200평도 샀다.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바로 고향 땅이었다. 그는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도 밤에 두 번이나 땅을 더 찾아가 봤다. 춤이라도 출듯이 기뻤다.
“살면서 그때만큼 기뻤던 때가 없었지요. 내 땅이 생겼으니까요. 지금은 그 보다 열 배, 백 배 이상 땅을 가지고 있지만 기쁨 만큼은 그때가 최고였어요.”
그 땅은 원래 고향 이웃 할아버지가 갖고 있었다. 큰 병에 걸려 오늘내일하시던 분이었다. 땅을 팔기 전 할아버지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꼭 성공할 거네.” 이틀 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천성적으로 부지런했던 임근규는 그 뒤 날개를 달았다. 배운 것은 많지 않았지만 천부적인 농사꾼의 진가가 하나둘 드러났다. ‘인덕농장’(仁德農場) 이라는 상호를 내걸고 토마토, 오이, 파, 배추와 무 등 작물을 심었다. 일하는 사람이 백 명에 가까웠다. 뉴질랜드로 이민 오기 전까지 받은 상도 열 개가 넘었다.
1990년대 초반, 소 파동 때 큰 이익 봐
1990년대 초반, 소값 파동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소값이 하루가 다르게 폭락해 너도나도 애지중지해가며 키우던 소를 처분하던 그 시절, 그는 오히려 소를 사들였다. 소 한 마리가 5~10만 원에 팔렸다. 남들은 물론 가족 친지 보기에도 미친 짓이었다. 정신병자라며 손가락질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그때 왜 그랬을까?
“나는 예상했어요. 곧 소값이 다시 오를 거로 생각했지요. 한 달 지나니까 소값이 직선으로 올라갔어요. 내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직감이었죠. 때마다 그런 직감이 내 사업을 키워 줬어요. 지금 생각하면 하늘의 도움이었죠.”
함평 우시장에서 소를 사던 때를 얘기했다.
“그때 우시장에 가 보니 내가 나이가 가장 어렸어요. 다들 오륙십은 되어 보였어요. 나는 그러니까 소시장에서는 풋내기에 불과했지요. 소를 사겠다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어요. 나는 닥치는 대로 소를 샀어요. 너무 많이 사다 보니까 나중에는 돈이 없어 머뭇거리기도 했고요. 그러면 나이 드신 분들이 다가와 ‘어차피 자네 아니면 팔 데가 없으니 외상으로라도 가지고 가라’고 부탁했어요. 그래서 한 마리 두 마리 늘린 게 나중에 백 마리까지 커졌죠.”
소 몇 마리로 시작한 이 사업은 한때 180마리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다. 작물 농장의 수입도 그 두세 배나 되었다. 동네에서 첫째 둘째 손가락으로 꼽힐 정도로 부농이었다.
“솔직히 말해 목축업을 처음 시작할 때 축사도 없었어요. 그냥 방목하다시피 했지요. 그때부터 뉴질랜드로 이민 올 팔자였나 봐요. 뉴질랜드는 소들을 다 풀어놓고 키우잖아요. 아무튼, 얼기설기 펜스도 치고 축사도 만들어 그럴듯한 소 목장을 할 수 있었어요. 소를 돌보는 일꾼만 다섯 명 정도 있었으니까 그런대로 크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에요.”
소먹이 짚단 엮는 기계 이탈리아에서 수입
임근규의 혜안은 또 다른 곳에서 빛났다. 시대(비즈니스)를 읽는 눈이 있었다. 소 키우는 사업을 하면서 얻게 된 정보를 남들은 다 무시하고 있을 때 그는 눈여겨 지켜봤다. 바로 소먹이, 짚단을 묶어 파는 사업이었다.
우리가 사는 뉴질랜드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소먹이용 풀을 둘둘 마른 짚더미. 그가 한국에서 소를 칠때, 그게 돈 되는 사업이 될 거로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짚단 엮는 최첨단 기계를 두 대나 사 왔다.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벤처 사업에 뛰어든 셈이다.
임근규의 고향, 전남 영암에서 이 기계는 ‘선진 농법의 상징’ 같았다. 보통 온종일 묶어야만 한 단 정도 만들 수 있었던 짚단이 딱 2 분 만에 한 단씩 예쁘게 묶여 나왔다. 아침부터 밤까지, 기계는 그리고 주인은 쉴 틈이 없었다. 매일 수백만 원이 그의 통장에 차곡차곡 더해졌다. 그는 돈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의 삼십 대는 그렇게 황금빛 낟알처럼 영글어 가고 있었다.
지구본 돌리다가 멈춘 곳이 뉴질랜드
1989년 어느 날, 그가 아내에게 물었다.
“자네, 어디 가고 싶은데 없는감?”
결혼 10주년을 앞두고 나름대로 준비한 소박한 이벤트였다. 아내는 긴가민가하면서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뉴질랜드에 가고 싶다고 했다. 지구본을 돌리다가 손가락이 멈춘 데가 바로 소와 양의 천국이라는 뉴질랜드였다.
며칠 뒤, 그는 비행기 표 두 장을 끊어왔다. 호주와 뉴질랜드를 도는 이 주간의 여행 일정이 잡혀 있었다. 부부는 딱 이틀 뉴질랜드에 머물렀다. 그때 본 뉴질랜드의 소 떼는 그들의 또 다른 꿈이 되기 시작했다. 저 푸른 초원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소 키우며 살겠다는, 꿈이었다. 그 꿈은 다다음 해 이뤄졌다. 그러나 그림같은 집도, 수 백마리 소 떼도 없었다. 그저, 낯선 나라의 척박한 땅만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글_프리랜서 박성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