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세 설움 딛고 ‘한국 채소의 대명사’ 자리매김
초창기에 산업스파이로 오해받아…
임대농사 6년 만에 데어리 플렛에 땅 구매
“위기를 뒤집어 읽으면 기회가 된다고 했던가. 그의 머리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 어쩌면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인지도 모른다. 자기 농장에서 직판하기로 한 것이다. 임대해 사용하던 농장의 창고를 대충 고쳐 가게를 열었다. 교민 신문에 조그맣게 광고도 냈다. ‘싱싱한 한국 채소 사러 오세요.’”
<지난 호에 이어>
그녀는 작다. 눈도, 손도, 얼굴도, 키도 작다. 심지어 목소리도 작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바로 앞에 있어도 그녀의 존재 자체를 잊을 수 있다. 발걸음도 사뿐사뿐. 결코 ‘튀어 보이지’ 않는다. 한물 지난 표현일지 몰라도 전형적인 현모양처 상이다. 자애로운 마음으로 자식을 돌보고, 소리 없이 남편을 내조하고 있다.
‘작은 여장부’. 맨 처음 그녀를 봤을 때, 나는 그 여린 몸에서 어떻게 그 많은 힘이 그치지 않고 나올 수 있을까 궁금했다. 하루 스물네 시간 아니 하루가 서른여섯, 마흔여덟 시간이라고 해도 일이 줄어들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사방에 보이는 게 그저 일 일 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힘든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천생 농사꾼의 아내였다.
그녀의 이름은 김순희. ‘순희’. 소박하게 예쁜 이름이다. ‘농사꾼의 아내’로만 이름을 묻어 버리기에는 조금 아깝다.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그녀는 그저 ‘캔농장 아줌마’로만 기억될 것이다. 이름을 다시 소리를 내 읽어본다. 김, 순, 희. 혀끝에서 번지는 공기가 한결 감미롭다. 김순희의 그 어느 날 꿈도 그렇지 않았을까?
2001년, 가방 두 개 들고 독고다이 정신으로 입국
2001년, 새천년의 환희가 조금은 식어갈 무렵에 임근규 김순희 부부는 오클랜드에 도착했다. 타카푸나 한 모텔에 여장을 풀었다. 가져온 것은 가방 두 개와 라면 한 상자 그리고 열 살 언저리에 있었던 두 아들. 수만 리나 날아왔지만 반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철저히 독고다이(일본어로 ‘특공대’라는 뜻. 조직과 상관없이 별도로 움직이는 사람) 정신으로 무장해야만 했다.
“광주나 목포 같은 큰 도시로 애들 유학 왔다, 그렇게 생각했지요. 살다 힘들면 그냥 돌아가려고 했어요. 정말로 아무 준비도 안 하고 왔고, 또 할 수 있는 마음의 여력도 없었지요. 여기 오기 전 몇 해는 정말로 힘들었거든요.”
모텔 생활을 일주일 만에 정리했다. 오클랜드 서쪽 메시(Massey)에 허름한 렌트 집을 얻었다. 침대와 냉장고, 세탁기, 식탁 등 기본적인 살림살이도 모두 중고가게에서 임대했다. 맘에 안 들거나 여차하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무리 살기 좋은 뉴질랜드라고 해도, 천생 농사꾼인 그들에게 고향 땅만큼 좋지는 않았다.
마흔 살 농사꾼, 임근규는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도 몸이 근질근질했다. 렌트 집이 모양새를 갖추자마자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오클랜드 서쪽 끝 웨누아파이(Whenuapai) 인근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교민들을 만났다. 품값은 안 줘도 좋으니 일만 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뉴질랜드식 농사법을 배우고 싶었다.
사람들은 그를 산업(농업)스파이로 여겼다. 영어 한마디 못 하는 사람이 뉴질랜드에 온 것도 이상하게 보았다. 농사를 책으로 배운 그들에게 농사를 몸으로 배운 사람은 못마땅한 존재였다. 그런데 얼마 안 가 진심이 통했는지 주위 농사꾼들이 하나둘 마음 문을 열었다.
임근규는 자기 세상을 만난 듯 기뻤다.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힘이 되어 주었다. 고향 전남 영암에서 수십만 평 농사를 짓던 그에게는 뉴질랜드 농사일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쉬운 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지인 도움으로 현지인 토마토 농장 임대
한 지인의 도움으로 현지인에게 농장을 빌렸다. 토마토 농장이었다. 그 사이 이민성에 사업비자를 신청했다. 서류를 접수한 지 일주일도 안 돼 비자가 나왔다. 영어는 부족해도 그쪽(농업) 부분에서는 최고 전문가라는 사실을 이민성이 인정해 준 것이었다. 한국에서 20년 넘게 농사를 지었고, 또 열 개가 넘는 농업 관련 수상 경력 때문이었다. 대통령상만 못 받았을 뿐 그 외 손꼽힌 상을 받은 만큼 전문농사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두 해 지나자 어느 정도 농사일이 안정되어갔다. 뉴질랜드 농사 짬밥도 익숙해졌다. 키위들이 즐겨 찾는 토마토나 오이 같은 것은 공판장을 통해 현지 시장에 내다 팔면 됐지만, 배추나 무, 고추 같은 한국 사람만 먹는 작물은 판로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세상이 참 야속하더군요. 우리 식구가 지극정성을 다해 재배한 작물을 교민들에게 팔 수 없다는 게 마음이 아팠어요. 어쩌면 텃세에 눌렸다고 볼 수도 있지요. 오클랜드 초짜 농사꾼은 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그때 실감했죠.”
임근규는 교민 식품업체 내 채소 가게를 돌며 판촉활동에 나섰다. 그러나 그 어디 하나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기존 거래처 때문이었다. 몇 날 며칠을 돌아다녔지만 한 곳도 뚫을 수 없었다. 승용차에 가득 채웠던 배추와 무 등 작물이 허무하게 내버려질 상황에 이르렀다. 그때만큼 뉴질랜드에 온 것이 후회될 때가 없었다.
위기를 기회로…농장 직판장 개설
위기를 뒤집어 읽으면 기회가 된다고 했던가. 그의 머리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 어쩌면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인지도 모른다. 자기 농장에서 직판하기로 한 것이다. 임대해 사용하던 농장의 창고를 대충 고쳐 가게를 열었다. 교민 신문에 조그맣게 광고도 냈다. ‘싱싱한 한국 채소 사러 오세요.’
‘캔농장’. 친하게 지내던 지인이 지어준 이름이었다. ‘근규’의 영어 이름(Ken)이자, ‘할 수 있다’(Can)는 뜻을 지닌 상호이기도 했다. 몇 년간 이름뿐이었던 캔농장은 그 뒤 교민사회에 한국 채소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캔농장 가게는 허름하게 시작됐다. 어른 주인은 늘 자리를 비웠고 서너 살 먹은 꼬마(자식) 주인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어른은 늘 일을 하고 있어서였다. 정해진 가격도 따로 없었다. 부르는 게 가격이었다. 그것도 주인이 부르는 게 아니라, 손님이 부르면 농산물 값이 정해졌다.
“한국에서는 일반인을 상대로 판매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격을 정하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손님보고 그냥 알아서 주시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다들 의아해하더군요. 게다가 우리는 늘 바빠 가게에 있지 않고 애들이 보다 보니 소꿉장난처럼 느껴졌지요. 그런데도 그때가 그립습니다. 사람 사는 정이 있었으니까요.”
자식들 ‘열 손’은 소 ‘백 마리’에 못지않아
임근규 김순희 부부는 위로 두 아들, 아래로 세 딸을 두고 있다. 두 아들은 토종 한국산, 세 딸은 뉴질랜드산이다. 19세기, 아니 20세기도 지난 21세기에 다섯 자식을 둔 집은 그리 흔치 않다. 어쩌면 철(?)이 없는 부모의 욕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농사꾼 처지에서 생각해보면 그 ‘열 손’은 소 ‘백 마리’에 못지않은 든든한 힘이다.
이십 대 중반 큰아들부터 이제 갓 열 살이 넘은 막내딸까지 그 어느 손 하나 귀하지 않은 게 없다. 돈을 떠나 그 손이 없으면 캔농장은 존재할 수 없다. 트랙터를 몰거나, 배추를 팔거나, 고추를 따거나 하는 크고 작은 일들이 이 다섯 자식, 열 손에서 이루어진다. 어떻게 보면 한참 놀거나 어리광부릴 나이인데도 그 누구 하나 불평을 하지 않는다. 부모의 정직한 땀이 어떻게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지 직접 보고 배워서이다.
그러나 그 어찌 어려움이 없었으랴. 아내 김순희 씨에게 물었다.
“농사일 하랴, 자식 키우랴, 많이 힘드셨죠?”
김순희 씨는 말을 삼켰다. ‘말해 뭐하느냐’는 뜻이었다. 작은 눈 속에서 깊은 슬픔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입 주위로 인고의 세월에 대한 뿌듯함 같은 게 흘러나왔다. 작은 여장부는 작지만, 안도하는 목소리로 거친 추억을 뱉어냈다.
“막내 키울 때였어요. 욕조에 애를 풀어놓고 깜박했어요. 그 사이 애가 잠이 들었나 봐요. 나중에 놀라 들어가 보니 아이가 물에 빠져 있었어요. 까딱했다가는 큰일 날 뻔했지요. 그런데 며칠 지나 애 귀에서 달걀노른자 같은 게 좔좔 흘러나왔어요. 몇 날 며칠을 그냥 무심히 지나갔는데… 다행히 별일은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들이 많았어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이가 목걸이를 삼켜 죽을 뻔한 일, 농장 웅덩이에 빠져 헤매던 일 등. 소주 한 잔 없이 일박이일 밤새워가며 얘기하라고 해도 할 자세였다. 그녀의 작은 눈에 눈물이 맺혔다. 아쉬웠지만, 나는 그 정도에서 얘기를 접어야 했다.
데어리 플렛에 땅 구매, 본격적인 농사 시작
임근규는 뉴질랜드 농사일이 어느 정도 손에 익자 내 땅에서 내 농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셋방살이가 지루하기도 했다. 또한, 자신감이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다.
“처음 땅을 임대한 뒤 몇 차례 장소를 옮겼어요. 그때마다 ‘아, 내 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고향에 두고 온 땅도 그리웠고요. 결국, 교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작물을 지으려면 모험을 한 번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지요.”
오클랜드 동서남북 외곽을 돌며 좋은 땅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가 오클랜드 북쪽 끝 데어리 플렛(Dairy Flat)에 있는 땅을 만났다. 5.5에이커(6,600평) 땅에다 온실과 가정집까지 끼어 있었다. 바로 임근규가 애타게 찾던 명당이었다. 2007년 7월 어느 날, 일곱 식구는 축하 잔치를 열었다. 밤하늘 밝은 보름달이 집을 비춰 주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