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프코(Safeco) 유리영 대표

시사인터뷰


 

세이프코(Safeco) 유리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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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의 마윈이 꿈워홀러 위해 힘 보탤께요

지난해 6월 비계 사업 시작, 올해 말까지 수주 금액 1천만 달러 달해

 

랭귀지 스쿨이나 대규모 숙소 같은 것을 갖춰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제가 그들의 힘으로 큰 만큼, 그들을 위해 어느 정도는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건축 관련 일을 하고 계시는 분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까 어떤 식으로든 교민 사회에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해 보고 싶습니다.” 

 


그는 현장 소장 같은 옷을 입고 나타났다. 진한 청색 점퍼 한쪽 어깨에는 ‘Safety First’(안전제일)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옷만 봐도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가능했다. 1970년대 중동 공사 현장 책임자를 보는 느낌이었다.

 “비계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집을 짓거나 건물을 철거할 때 임시로 만들어 놓는 발판 말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보통 아시바라고 하면 쉽게 이해하시죠. 영어로는 스캐폴더(scaffold)라고 하고요.”

 단도직입적으로 나이를 물었다. 서른한 살(1984년 생)이라고 답했다. 중저음 목소리에서 조금은 비릿한 냄새가 묻어나왔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든 사람도 하기 힘들다는 건축 쪽 일을 하는 사람치고는 얼굴도, 목소리도 순수해 보였다.

 “건축에 자도 모른 채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크라이스트처치 지진 이후 건축 경기가 활성화되면서, 그중에서도 제가 비교적 접근하기 쉬운 비계 사업이 잘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덤벼들었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청년 정신으로 말입니다.”

 유리영 대표는 2007년 군대 제대 후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뉴질랜드에 왔다. 만 스물세 살이었다. 워크 비자와 영주권을 받는 동안 그는 숱한 고생을 사서 했다. 스시 가게 종업원, 슈퍼마켓 청소, 데어리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버텼다.

 “겁 없이 스물한 살에 한국에서 첫 사업을 벌였습니다. 아쉽게도 결론은 부도로 끝났고, 제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도가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든 빚을 갚고 말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뉴질랜드에 도착한 지 5년 후, 그는 모든 빚을 깔끔히 정리했다. 하루 두세 시간 잠을 자며 힘들게 이룬 열매였지만 돌아보면 젊음의 날개를 다시 한 번 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사이 자기가 일하던 스시 가게를 하나 인수했으며, 비록 적은 돈이지만 새 사업을 할 수 있는 종잣돈(?)도 마련했다.

 그런데 부도가 난 청년이 몇 년 사이 그 많은 빚을 다 갚고 사업자금까지 만들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플렛 방도 아닌 거실에서 5년을 살았습니다. 제가 워홀(워킹 홀리데이) 출신인 만큼 다른 워홀러들이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대상으로 사업을 했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1,500명이 넘는 워홀러들이 저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됐고, 그들과 상생하며 일을 벌여 나갔습니다. 한 달에 2~3만 달러를 벌어들였습니다.”

 지난해 6 14, 유리영 대표는 뉴질랜드 정부에 정식으로 회사를 등록했다. 회사명은 세이프코.(Safeco) 이제 겨우 사업경력이 한 해 지난 신생 회사이다. 그런데 이 새내기 회사의 현재를 보면 입이 벌어질 정도로 놀랍다. 사무실 및 현장을 합쳐 정규 직원이 40명에 이른다. 매출은 250만 달러, 수주받은 금액은 1천만 달러에 이른다.

제가 알기로 뉴질랜드에 비계 사업을 하는 곳이 72곳이 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 우리 회사는 73번째였습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20157월 현재, 우리 회사 순위가 8위입니다. 앞으로의 목표는 동메달, 3위까지 꿰차는 것입니다. 또다시 부도가 나지 않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믿습니다.”

유리영 대표는 막힘 없이 사업 구상을 얘기했다. 거칠 것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없이 겸손했다. 그는 무엇보다 한인 건축 관계자에게 공을 돌렸다.

저는 도면도 읽지 못합니다. 건축에는 문외한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건축사를 비롯해 건축 관련 일을 하시는 많은 분이 제게 힘을 실어 주셨습니다. 아직도 한없이 부족하지만 그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의 저나 우리 회사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정말로 감사를 표시하고 싶습니다.”

 이 대목에서 그의 사업 스타일을 한 번쯤 듣고 싶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한 얘기.

창업할 때 사업자금은 딱 3만 달러 있었습니다. 덤프트럭 두 대를 사서 시작했습니다. 중국에 가서 내 나름대로 담판을 벌였습니다. 비계를 만드는 회사를 찾아가 앞으로 1년 내 2천 톤(40억 상당)의 물량을 소화하겠다며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긴가민가하는 그쪽을 설득해 결국 이뤄냈습니다.”

이를 계기로 유리영 대표는 한국에서 80억에 가까운 자금을 지원받았다. 그 후 사업은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현재 그의 회사는 오클랜드 서쪽에 있는 그린 베이 하이 스쿨(Green Bay High School) 공사 등 70곳의 공사 현장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중국에서 들여온 물량도 3천 톤에 이른다. 비계 사업 경력 1년도 안 된 회사치고는 대단한 성장세이다.

그는 누구보다 중국의 알리바바 그룹 회장인 마윈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평범 속에서 비범을 찾는 마윈을 닮고 싶습니다. 비계 사업이 안착이 되면 건축 자재 판매 사업을 하려고 합니다. 시내 사무실과 마운트 웰링턴에 있는 현장 사무소를 합쳐 아본데일 쪽에 큰 공간을 하나 얻을 생각입니다. 2의 도약을 해나갈 예정입니다.”

유리영 대표는 남태평양 쪽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 바누아투, 피지 등을 방문해 발판을 마련해 놓았다. 알아보고 가는 식이 아니라, 가서 알아보는 식이다, 전형적인 돌쇠형이다.

워홀 출신인 그는 누구보다 워홀러의 고충을 잘 안다. 그래서 그의 사업이 어느 정도 제 자리를 잡으면 그들을 위해 나눔을 실천하겠다고 밝혔다.

랭귀지 스쿨이나 대규모 숙소 같은 것을 갖춰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제가 그들의 힘으로 큰 만큼, 그들을 위해 어느 정도는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건축 관련 일을 하고 계시는 분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까 어떤 식으로든 교민 사회에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해 보고 싶습니다.”

인터뷰는 저녁 식사를 포함, 세 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그사이 대화가 자주 끊겼다. 5~10분 간격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양해를 구했고, 나는 웃으며 이해한다고 말했다. 서른한 살, 청년 CEO 유리영 대표. 뉴질랜드 한인 사회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그의 어깨가 조금은 무겁게 느껴졌지만, 내 얼굴에서는 알 수 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장도에 한없는 운을 빈다.

_프리랜서 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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