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사회, 다음 세대를 잇는다24; Ray White 민기홍 부동산 중개사

시사인터뷰


 

한인 사회, 다음 세대를 잇는다24; Ray White 민기홍 부동산 중개사

일요시사 0 1,505



사람 마음까지 사는 전문가가 되는 게 꿈이에요


부동산 시장에서 어떻게 되겠지는 금물변동성 깊게 고려해야

 


의식주.(衣食住)

먹고, 입고, 자고. 지상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든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삼대 과제다. 그 가운데 주()의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없다. ()나 식()에 견줘 한 번에 들어가는 돈이 많아서다. 그 문제만 잘 풀어도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기반을 잘 다졌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뉴질랜드에서 가장 뜨거운’(hot) 주제는 바로 부동산, 다시 말해 집 마련이다. 특히 오클랜드의 경우, 수요보다 공급이 한참 모자라 다들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한인 사회에서 부동산 중개로 의식(衣食)을 풀어가는 사람이 100명이 넘는다. 그중에는 아직 서른도 채 안 된 젊은 부동산 중개사가 있다.

 

아버지 사업 IMF 직격탄 맞아

민기홍 부동산 중개사.

그가 일하는 엡솜(Epsom) 지점을 찾았다. 사무실 벽에는 내 눈을 유혹하는 멋진 집 사진 사이로 솔드’(Sold)라는 굵직한 글자가 새겨진 전광판이 스쳐 지나갔다. 부동산 중개사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 바로 그거였다.

어서 오세요. 일부러 찾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기홍은 예의를 갖춰 말했다. 어쩌면 철저하게 직업적 멘트(announcement)로도 볼 수 있는 그 말이, 전혀 그렇게 와 닿지 않은 이유는 말 속에서 진정성을 느낄 수 있어서였다.

기홍은 1998 6, 오클랜드에 왔다. 어머니와 연년생 남동생과 함께였다. 아버지는 바로 한 해 앞서 터진 IMF 직격탄의 피해자였고, 자연스럽게 힘든 이민 짐을 챙겨야만 했다. 그나마 미리 받아놓은 뉴질랜드 영주권이 희망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을 다니다 왔어요. 아버지는 한국에서 돈을 벌어야 했어요. 처음에는 독하게 살았어요. 얼핏 통장 잔액이 간당간당한다는 얘기도 들었고요. 다행히 어머니가 대장부 스타일이라 곤경을 지혜롭게 헤쳐 나갔어요. 저도 어렸을 때부터 독립심을 가졌고요.”

기홍은 인터미디어트(Year 7) 때부터 돈벌이에 나섰다. 어머니가 용돈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역 신문(North Shore Times) 배달 일(Paper Boy)을 해서 자기 군것질은 해결했다. 그 뒤 대학 졸업 때까지 또래 친구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경력을 쌓았다. 피자 배달, 학교 청소 보조, 음식점 서빙, 대형 문구점 시간제 직원, 영화 자막 번역, 학원 교재 번역 등.

 

칼리지 때 럭비와 스쿼시 선수로 뛰어

칼리지 시절에는 운동에 빠져 지냈다. 웨스트레이크 보이스 하이 스쿨(Westlake Boys High School)에 다닐 때 한국 학생들에게는 그리 친숙하지 않은 럭비와 스쿼시 선수로도 뛰었다. 운동을 통해 키위 사회를 간접적으로 경험했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 젊은 친구였다.

2008년 기홍은 오클랜드대학 법학과에 들어갔다. 아쉽게도 한 과목(Logic)의 점수가 낮아 2학년으로 올라갈 수 없었다. 기홍이 택한 돌파구는 한국행, 어쩌면 피난처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칼리지 때부터 뮤직 밴드를 했어요. 저는 처음에 드럼을 치다가 보컬로 옮겼고요. 노래를 잘 한다고 생각했기에 가수가 되려는 마음으로 한국에 간 거예요. 석 달을 있다 되돌아 왔어요. 오디션에도 합격해 정말로 가수가 될 수 있었는데 제가 그냥 꿈을 접고 말았어요.”

기홍은 다시 오클랜드대학 상대에 들어갔다. 매니지먼트 앤 인터내셔널 비즈니스(Management & International Business)를 골라 3년 뒤 무사히 학업을 마쳤다. 졸업을 하고 잡은 첫 직장은 알바니에 있는 노엘 리밍(Noel Leeming). 가전 제품을 주로 파는 곳이었다.

그다음 시내 퀸 스트리트(Queen Street)에 있는 지점으로 옮겼다. 3년 정도 일을 하면서 맘껏 세일즈 실력을 뽐냈다. 전국에 있는 지점을 대상으로 한 주간 세일즈맨 랭킹’(Weekly Top Salesman)에서 7위를 차지하는 등 잘 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기홍은 자기 사업, 노력한 만큼 열매를 볼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어머니 도움으로 부동산 중개사 일 시작

자연스럽게 어머니(최소영, 경력 11년 차)가 하는 부동산 중개사 일을 떠올렸다. 오클랜드 한인 사회에서 잘 알려진 어머니도 반대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든든한 우군이 되어 주었다.

어머니 도움이 없었다면 시작도 못 했을 거예요. 알바니(Albany) 지점을 시작으로 지금 일하는 엡솜 지점까지 자격증 취득 등 많은 분야에서 힘을 실어 주었어요. 제 적성과도 잘 맞아, 길게 보고 성실히 해나갈 생각이에요.”

이 대목에서 나의 야릇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동안 집을 몇 채나 파셨나요?”

기홍은 꼭 말해야 하나요?”하며 조금 빼기는 했지만, 결국 일급비밀을 털어놓았다. 두 자리에 이르는(앞자리까지는 밝힐 수 없다) 놀라운 숫자였다. 1년이 채 안 됐는데도 말이다.

집을 사고파는데 있어 꼭 알아 두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불문율의 법칙이 있다고 믿어요. 늘 변동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거예요. 은행 이자율부터 벌 수 있는 수입까지, 바뀔 수 있는 상황이 너무 많아요. 집을 사고파는 일을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시점에서 결정하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잘못하다가는 마켓(부동산 시장)에다 주게 되거든요. ‘어떻게 되겠지하다가는 정말 낭패를 보기 쉬워요.”

인터뷰가 무르익어가면서 기홍의 답변도 따라 무르익어갔다. ‘그 나이에 알면 얼마나 알까?’하는 기우에서, ‘이 정도면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겠다하는 기대에까지 미쳤다. 경력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이 더 중요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인격과 실력 겸비된 중개사 되고 싶어

부동산 중개사 일은 집을 사고파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손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게 제일 중요해요. 집은 누구나 거래할 수 있지만, 사람 마음까지 그렇게 하지 못하거든요. 저는 사람 마음까지 살 수 있는 중개사가 되고 싶어요.”

참 멋진 말이 아닐 수 없다. ‘사람 마음을 사는 것.’ 젊은 친구가 그 정도 경지까지 생각한다는 자체가 내게는 신비하게 다가왔다.

기홍이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꿈은 무엇일까?

제가 일하는 이곳 지점의 사장님이 레이 화이트에서 가장 집을 잘 파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집을 잘 파는 사람으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인격적으로 상당히 존경할 만한 분이에요. 저 역시 한인 사회에서 부동산 중개사로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앞으로 인격과 실력이 겸비된 전문 중개사로 인정받았으면 좋겠어요.”

큰 사람.’

기홍은 큰 사람이 되는 게 삶의 신조라고 했다. 학창 시절에 배운 된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모든 걸 크게 보고, 넓게 생각하려고 애를 쓴다. 나이에 견줘 살아야 할 날이 훨씬 많은 젊은이의 철학이기도 하다. 꿈의 규모(스케일)가 커야, 앞날 이룰 규모도 크다고 믿고 있다.

정말로 쉽지 않은 직업이지만, 만에 하나라도 같은 길을 가겠다는 사람에게는 이런 도움말을 해주고 싶다고 했다.

이 일은 무던한 성격을 가진 사람에게 잘 어울려요. 산다고 해 놓고 안 사거나, 매물로 주겠다고 해놓고도 안 주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거든요. 그 사람도 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까 그렇다고 생각해야 해요. 오가는 돈의 액수가 커서 어쩔 수 없거든요. 저도 그런 마음으로 일을 하다 보니까 마음이 편해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약속

기홍은 뜻이 깊은 친구였다. 어쩌면 그것은 다양한 경험과 책을 많이 읽은 지혜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한국말도 전혀 서툴지 않았고, 앞날의 꿈도 분명해 보였다.

마지막으로 나는 조금은 거슬리는질문을 던졌다.

부동산 중개사가 가끔 욕을 먹기도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기홍은 웃으며 답했다.

어느 분야든 다 있는 일이긴 한데, 저희가 하는 일이 워낙 큰돈이 오고 가다 보니 더 많은 욕을 먹는 것 같아요. 저는 1.5세 부동산 중개사로서 한 가지만큼은 분명히 약속드릴 수 있어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게 오래 가는 비법이고, 직업으로서 제가 가질 수 있는 자부심이라고 봐요. 성실히, 그리고 열심히 할게요. 지켜봐 주세요.”

이 마지막 말을 기홍은 길게, 진지하게 했다. 다음 세대를 잇는 1.5세 중개사로서 한인 사회에 결코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이제 이민 1세대의 역할은 서서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여러 분야에서 세대교체가 하나둘 펼쳐진다. 그 한 역()을 기홍이 제대로 잘 해나가길 바랄 뿐이다.

 

부동산 중개사 민기홍.

그는 지난해 결혼을 했다. 프러포즈를 할 때 박효신의 노래 <야생화>로 여자 친구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동갑내기 여친은 그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그리고 청혼을 받아들였다.

이 얘기를 듣는 동안 나는 그의 당찬 자신감을 엿볼 수 있었다. 공손하면서도 거칠 것 없는 말투에, 앞날을 향한 다부진 포부에 나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희열을 느꼈다. 내가 못 이룬, 우리 1세대가 하지 못한 역사를 만들 것 같다는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보잘것없는 저를 만나 주셔서 고맙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_프리랜서 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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