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사회, 다음 세대를 잇는다(26)-오클랜드대학 음대 김정석 음향 기술자

시사인터뷰


 

한인 사회, 다음 세대를 잇는다(26)-오클랜드대학 음대 김정석 음향 기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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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은 제2의 창작언젠가는 제 앨범도 낼 거예요


피자헛 매니저, 콜센터 직원 거쳐 음향 기술자로 우뚝 서

 

 

 첫인상이 범상치 않았다. 한눈에 봐도 예술가였다. 긴 머리, 헐렁한 티와 빛바랜 청바지 그리고 대충 신은 슬리퍼. 약간은 슬퍼 보이는 눈동자 사이로 표범의 고독을 느꼈다.

사무실도 마찬가지였다. 밤을 새워 작업이라도 했는지 책상 위는 어수선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음향 장비가 곳곳에 놓여 있었다. 주위를 떠도는 공기 마저 예술처럼 다가왔다.


 


독일에서 7년 생활, 1996년에 이민 와

 음향 기술자, 김정석.

 그를 만났을 때 직감적으로 얘깃거리가 많겠다는 느낌이 왔다.

 정석의 나이는 올해 서른넷. 1996년 부모를 따라 뉴질랜드에 이민을 왔다. 그 전 독일(프랑크푸르트) 생활 7년까지 합치면 고국에서 산 기간은 불과 몇 년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말을 유창하게 했지만 한국에 대한 특별한 추억이 없는 것은 그 까닭이다.

 정석은 웨스트 레이크 보이스 하이스쿨(Westlake Boys High School)에 들어갔다. 한창 뛰어놀고 사고(?)를 칠 나이였지만 누구보다 조용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천성이 그랬다고 한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음악.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해 드럼을 맡아 내면의 소리를 토해냈다. 음악은 먹먹한 사춘기 시절의 돌파구였다. 그것이 훗날 그의 직업과 연관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원래 꿈은 비행기 조종사였어요. 하지만 부모의 반대로 접었지요. 어쩌면 제 의지가 너무 약해 포기했을 거예요. 칼리지 시절, 기타를 찰 치는 친구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어요. 갈망의 대상이었죠. 뜻 맞는 친구들과 함께 연주 활동을 했어요. 오래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그때 밴드 이름이 루시퍼’, ‘헬시온이라고 했던 것 같아요.”

 

대학 중퇴하고 피자헛 매니저로 일해

 정석은 2001년 오클랜드대학에 입학했다. 전공은 바첼러 오브 테크놀로지.(Bachelor of Technology) 순수 기술과학 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자기의 관심사와 전혀 달랐지만, 천성이 모든 것을 무난하게이어가는 스타일이라 별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공부는 16개월을 넘기지 못 했다. 본인 표현에 의하면 열정 부족 탓이었다. 부모에게도 알리지 않고 학교를 그만 뒀다. 그가 택한 길은 피자헛의 부 매니저. 칼리지 때부터 시간제로 해오던 피자헛 일에 전념하기로 한 것이다. 그 일을 2년이나 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까 육체적인 노동을 하기가 싫어졌어요. 본사로부터 매출에 대한 압박도 컸고요. 일하는 시간이 길어 제 개인 시간도 가질 수 없었고요. 11시까지 일하기도 했으니까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싶어 전직을 했어요. 콜 센터 회사로 옮겼어요.”

 콜 센터 일은 정석의 표현대로 몸빵’(몸으로 때우는 일)이었다. 연봉이 좋아 2년이나 일했지만, 경력으로 삼을 것은 별로 없었다. 이십 대 중반, 또 한 번 사표를 냈다. 그 뒤, 그는 MAINZ(Music and Audio Institute of New Zealand)에 문을 두드렸다. 알게 모르게 그의 마음속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음악의 열정을 정식으로 드러낸 것이다.


 


MAINZ에서 정식으로 음향 기술 배워

 정석은 거기서 음향 기술을 제대로 배웠다. 2년이 지나 음향 기술자라는 자격증(Diploma)을 얻었다. 하지만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정신적으로 춥고 배고픈 생활이 이어졌다. 음악을 하는 사람의 운명이었다.

 정석이 찾은 길은 좀 더 공부하는 것이었다. 오클랜드대학 사운드 리코딩(Sound Recording, Post Graduate)과에 입학했다. 지금은 그 과가 없어져 버렸지만, 그때만 해도 음악인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전공이었다. 그는 3년을 공부했다.

 “공부하면서 교수님이 주신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어요. 여러 연주의 녹음을 담당했고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계약직 직원으로 일하다가 몇 년 전에는 정식 직원으로까지 올랐고요. 이제는 이 건물의 모든 일을 맡아 하는 총책임자가 됐지요.”

 ‘이 건물이란 오클랜드 시내 쇼트랜드 스트리트(74 Shortland St.)에 있는 거스 피셔 갤러리(Gus Fisher Gallery)를 말한다. 1930년대에 지어진 이 건물은 현재 오클랜드대학(음대) 소유로, 한때는 텔레비전 방송국(TVNZ)으로 사용됐다. 지금은 오클랜드시가 헤리티지 건물로 지정해 함부로 손댈 수 없는 보물이기도 하다.

 정석이 하는 일은 성악가 또는 연주자나 악기의 소리를 제대로 남기는 일이다. 음향 기술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노래나 연주의 질이 달리 기록된다. 주연은 못 돼도 충실한 조연 역할을 하는 게 바로 음향 기술자의 역할이다.

 “10초 단위로 끊어 녹음하기도 해요. 드럼 하나를 녹음한다고 해도 20개의 마이크가 설치되지요. 큰 공연 작업에 들어갈 경우에는 수많은 마이크가 동원되고, 몇 날 며칠을 애를 쓰기도 하고요. 창작은 아니지만 음악에서는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소리 없이 돕는 도우미라고 믿어요.”

 

취미는 마이크 모으기, 수천 달러짜리도 있어

 정석의 취미는 마이크 모으기. 집과 사무실, 학교 창고에 수십 개의 마이크를 보관하고 있다. 그 가운데는 전설적인 록밴드 비틀스가 사용했던 같은 형태의 마이크도 있다. 한 개의 수천 달러에 이를 정도로 비싸지만, 마이크 상태에 따라 녹음의 질이 달라 그 무엇보다 첫 번째 투자 순위에 올려놓고 있다.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이 일은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겠다, 는 생각을 했다. 넌지시 그에게 물었다. “같은 꿈을 꾸는 젊은 친구들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냐.

 정석은 이 대목에서 한동안 말을 멈췄다. 그러더니 나를 쳐다보며 씩 웃었다.

 “하지 말라고 하고 싶어요. 무엇보다 춥고 배고픈 일이잖아요. 졸업한 뒤 취직한다는 보장도 없고, 또 얼마나 험한 길을 걸어야 자기가 원하는 길에 들어설 수 있는지도 모르거든요. 그래도 꼭 하고 싶다면 이런 말을 해주고 싶어요. ‘음악은 절대 고독한 작업이다. 굉장히 잔인하다. 여기 뉴질랜드는 텃세도 있다.’ 이걸 이길 자신이 있다면 도전해 봐도 돼요.”

 정석은 깊은 한숨을 자주 뱉었다. 세계가 급속도로 변하면서 문화 예술의 위치가 점점 움츠러들고 있어서 그럴 것이다.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세대를 묵시적으로 표현한 것 같았다. 나는 조금은 우울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화제를 자주 바꿨다.

어떤 과정을 거쳐 녹음이 진행되는지 좀 보여 주세요.”

 그제야 정석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그와 함께 둘러본 건물 내부는 별천지였다. 온통 검은 천으로 둘러싸인 작업실은 녹음 시설로 빼곡했다. 대충 노래를 불러도, 어설픈 연주를 해도 지상 최고의 소리가 나올 정도로 멋져 보였다. 일인 독주부터 합주, 합창 등 소리의 기록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공간이었다.


 


녹음 시설 언제든 빌려 쓸 수 있어

 나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그에게 물었다.

 “! 너무 멋지네요. 음악을 하는 교민을 위해 도움을 주시면 좋겠는데, 가능한지요?

 정석은 선뜻 답을 했다.

 물론이죠. 음악을 하는 젊은 친구나 녹음을 남기고 싶어 하는 단체가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 도울게요. 저희 시설이 뉴질랜드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잘 갖춰져 있으니까 최고의 작품이 나오리라 믿어요.”

 인터뷰는 두 시간 가깝게 이어졌다. 나는 그의 음악 세계를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 모두 돈 되는 일에만 매달리는 삭막한 이 세상에서 조금은 색다른 삶을 사는 그가 멋져 보였고 위로해 주고 싶어서였다.

마지막으로 꿈이 무엇인지 물었다.

 “솔직히 말씀드려 대단한 꿈은 없어요. 제 성격처럼 조용히 사는 삶을 추구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굳이 꿈이라면, 언젠가는 남의 음악이 아닌 제 음악(소리)을 남겨 보고 싶어요. 앨범도 내고 싶고요. 조연의 삶에서 주연의 삶으로 올라간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그걸 바라며 살고 있어요.”

 정석의 말은 느렸다. 사이사이 여백의 소리가 숨어 있었다. 나는 정석이 10년이 다 되게 소리를 만지는 일을 해와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흘러나온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도 말 못할 창작(2의 창작이라고 할 수 있음)의 고통이 있을 테니까 말이다.

 

 누구나 편한 길을 가고 싶어 하는 게 사람의 속성이다. 하지만 모두가 다 똑같은 길만 걷는다면 결코 새 길이 생길 수 없다. 한인 사회도 마찬가지다. 조금은 서툴어도 다른 길을 가는 젊은이들이 많아야 한다. 그게 우리 사회를 더 풍성하게, 사람 사는 세상답게 만들 것이라고 믿는다.

 여름의 끝 무렵 어느 날, 나는 새 길을 애써 만드는 한 젊은이를 만날 수 있어 그지없이 행복했다.

_프리랜서 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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