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총시즌 재계, 사내 ‘권력암투’ 막전막후
재계는 지금…‘묻지마 투서’ 전쟁 중
[일요시사=경제1팀] ‘내부 고발자’의 투서에 기업들이 떨고 있다. 기업 내부에서는 비리 등과 관련된 투서·진정이 난무하고, 기업 밖에서는 공직자나 기업주를 흔드는 소문이 꼬리를 물고 있다. 공공연한 비밀로 치부되던 내부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고발자가 사람 잡는 시대다.
“○○○ 부사장은 계약직 여직원을 사적인 자리에 불러내 성추행했다.” “○○○ 임원(후견인)은 스폰서가 한둘이 아니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기업 내부 인사들을 흠집 내는 투서가 쏟아지고 있다. 업계의 표현대로라면 과거엔 아무리 회사가 섭섭하게 해도 몸담았던 조직의 발을 찍는 일은 없었는데 최근 들어 부쩍 내부 고발자가 늘고 있다.
사정기관들은 이런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으며 차기 정부가 들어선 이후 대대적인 물갈이 인사에 나설 것이란 흉흉한 소문까지 더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주요 기업의 조직 분위기가 크게 술렁이고 있다.
“이대론 안 돼”
내부고발자 급증
A공사는 최근 팀장급 직원이 공개한 C부사장의 인사비리 등 폭로 투서로 몸살을 앓고 있다. 공사 조사연구실에서 일하던 김모팀장은 지난달 22일 개인 블로그에 ‘파행경영과 비리 주역 C부사장의 파면을 요구한다’는 장문의 글을 올렸다. 김 팀장은 이 글에서 C부사장을 지목해 독단적 인사권을 행사하면서 사내 파벌을 조장하고 각종 비리를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김 팀장은 “공사가 고위간부로 재직 중인 C부사장 개인의 사조직이나 다름없이 운영되고 있으며 C부사장의 파행경영과 비리가 대표정책금융기관을 지향하는 공사의 정체성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며 “이런 파행경영이 3년간 지속되고 있지만 많은 직원들이 혹시 인사실권자(C부사장)로부터 불이익을 받을까 벌벌 떨면서 ‘양들의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김 팀장은 우선 자신이 경험한 2010년 팀장 인사평가 문제를 지적하며, 산업은행 출신과 비산업은행 출신의 인사 차별에 대해 언급했다.
김 팀장은 “인사팀의 비산업은행 출신 부서장들에게 ‘다른 사람을 먼저 승진시켜야 한다’는 등의 황당무계한 논리로 이미 제출한 평가 점수를 낮춰 다시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며 “이는 산업은행 출신이 아닌 관계로 업무프로세스가 익숙지 않은 비산업은행 출신 부서장들을 농락한 것이나 다름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C부사장은 노골적으로 ‘내가 있는 한 외부출신의 승진은 없다’ ‘사장도(임기가 끝나면) 나간다. 나한테 줄 잘서라’ ‘(비산은출신 팀장에게) 내가 당신을 부장시키면 사장 앞에서 나를 씹을 것 아니냐’고 말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주총·인사 앞둔 공기업·대기업 ‘폭로 몸살’
비리·성추문 등 의혹 봇물…고소·고발 난무
김 팀장은 C부사장의 현금상납설과 성추행설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는 “(공금의) 지출명목 허위작성은 일상화된 일”이라며 “일부 부서장들은 업무추진비는 물론 각종 회의비, 야식비까지 개인의 쌈짓돈처럼 쓴다”고 주장했다.
이어 “(C부사장이) 계약직 여직원에게 직접 전화해 사적인 저녁식사자리에 동참시킨 일도 있었다”고 파행을 폭로했다. 글의 마지막에는 감사실과 컴플라이언스팀에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해 낱낱이 조사해 줄 것을 당부했다.
해당 글이 확산되자 A공사는 감사원 감사를 실시, 지난 6일 전격적으로 임원 인사를 단행해 투서에 당사자로 지목된 C부사장의 모든 직무와 권한을 중지시킨 것으로 확인됐다.
C부사장은 공사의 경영기획본부장을 맡아 기획과 인사, 자금, 국제금융, 해외사업 등의 주요 핵심 업무를 담당해 왔으나 이번 인사로 사실상 대기발령 상태에 놓였다. 공사는 대외적인 이미지 실추를 막기 위해 조기에 사태 진화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청장 눈에 들면
1계급 특진?
B청은 ‘투서’를 발단으로 고위 간부들끼리 맞고소를 놓는 볼썽사나운 꼴을 연출하고 있다. L청장은 지난달 S 전 본부장과 B 현 간부를 무고 및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이는 S 전 본부장이 L청장을 고소한데 대한 맞고소다.
이들의 갈등은 지난해 11월 당시 S본부장이 직위해제 되면서 시작됐다. S 당시 본부장이 L청장의 영남 중심 지역 편향적 인사와 개인 비리 등을 담은 투서(A4 11장)를 감사원·국회에 제보했다는 이유에서였다. S 전 본부장은 직위해제 직후 L청장을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이후 감사원은 L청장에 대한 감사를 진행했고, 국회 국정감사에서 관련 질의와 답변이 오갔다. 그 사이 L청장은 S 전 본부장을 검찰에 맞고소했다. 두 달 남짓 감사를 벌인 감사원은 지난 7일 감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S 전 본부장의 손을 들어줬다.
감사원에 따르면 L청장은 지난해 1월 임의로 승진 심사절차를 간소화하고 한 직원을 특별 승진시켰고, 2011년 7월에는 전입요건을 갖추고 못한 지방직 공무원 4명을 국가직 공무원으로 전보 조치했다.
L청장은 또 자신이 차장으로 재직시절 직원들로부터 수 백만원 상당의 향응을 접대 받았다는 투서를 감사원에 보냈다며 한 직원을 의심해 이 직원을 ‘직무수행 능력과 근무성적이 극히 불량하고 성실·복종 및 품위유지의무를 위반하였다’는 이유를 붙여 강등 조치를 하기도 했다.
감사원의 발표에 따라 하극상으로 비춰지던 B청 수뇌부 간 갈등은 ‘총수의 인사전횡’이라는 반전으로 매듭짓는 분위기다. 조직 초유의 고소·고발 사태에 대해 B청의 한 직원은 “결국 인사 문제를 둘러싼 투서와 총수의 무원칙, 비리로 촉발한 일”이라고 한탄했다.
실제 B청 감찰계에 들어오는 투서는 한 달 평균 3∼4건 이지만 인사철이 되면 10배 가까지 폭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직원 투서로
시장 추락 위기
기업들 역시 인사철에 몰리는 투서에서 자유롭지 않다. C사도 지난 2006년 임원 인사를 둘러싼 투서로 한동안 곤욕을 치렀다.
당시 투서문건에 따르면 J회장의 핵심 측근들이 기업 내 J회장 주변에 ‘인(人)의 장막’을 치고 독자적인 세력구축을 위해 인사를 전횡했다고 주장했다. 문건은 특히 이들이 주요 임원 인사 과정에서 조직적으로 경쟁자를 제거했다는 주장까지 담고 있어 논란을 키웠다.
지난 2009년 D그룹 차기 회장 선출을 앞두고도 때 아닌 투서 소동이 일어났다. 차기 후보로 유력한 모 인사가 수년 전에 D그룹 내부정보를 이용해 거액의 차익을 거뒀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투서가 날아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D그룹이 납품받는 과정에서 친인척 회사에 대규모 특혜를 줬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투서까지 나와 충격을 줬다.
E그룹은 동생이 회장으로 추대되는데 반대한 형이 동생의 비리를 담은 투서를 검찰에 제출하면서 골육상쟁의 불씨를 만들었다.
이에 검찰은 E그룹 전반에 대한 비리 조사를 실시했고, 조사결과 두 형제 모두 유죄가 입증 돼 나란히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사정기관에도 진정서 쌓여…내사 돌입
해당 기업들 좌불안석 “정보풀 가동”
이후 형은 E그룹에서 제명됐고,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중견 기업을 인수했지만 자금난, 실적 부진 등으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이듬해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F사는 한 직원의 투서로 중국시장에서 추락할 위기에 놓였다. 중국 현지에서 ‘모범답안’으로 불리며 승승장구하던 F사에 돌이킬 수 없는 오명을 가져다 준 투서가 공개된 것이다.
지난 2006년 말 중국 상하이의 F사 A/S업체에 근무하던 한 직원은 당시 “F사가 판매 과정에서 일부 문제가 있는 에어컨을 자체 수리 및 재포장 과정을 거쳐 새 제품으로 둔갑시킨 뒤 소비자에게 재 판매했다”는 내용의 투서를 보냈다.
당시 F사 측은 일부 A/S센터에서 일부 문제 제품에 대해 수리과정을 거쳐 포장만 다시한 후 판매한 사실이 있었음을 시인하며 회사에 책임이 있다고 인정했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F사는 기업 이미지는 물론 신뢰도에 큰 타격을 입었다. 중국 시장 내에서 ‘반(反 ) F사’ 조직이 출범하는 계기가 됐고, 최근까지도 F사의 판매율은 꾸준한 하향곡선을 그리며 곤두박질치고 있다.
‘고발’은 짧고
‘고생’은 길다?
이런 과정에서 다수가 입은 상처는 컸다. 전문가들은 문제점 개선을 위한 투서문화는 환영해야 할 일이지만 각종 이해관계에 따른 감정적 고소고발은 오히려 분열과 갈등을 양산해 사회를 좀먹는 병폐로 작용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한 대학 교수는 내부고발자의 증가에 대해 “우리 사회의 투명성을 높일 수 있는 기회”라며 “인터넷의 확산이 갖가지 부작용도 일으키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땐 긍정적인 것처럼 내부고발자도 불투명한 사회의 제도와 법을 보완하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고 내다봤다.
한 노조 관계자는 “민주주의는 절차의 합리성과 정당성이 보장돼야 하는데 국내 기업들의 경영 형태는 아직 불합리한 점이 많다”며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구조적으로 계속 충돌이 일어날 것이다. 고발은 짧고 고생은 길다”고 강조했다.
반면 사정기관 관계자들은 “근거 없는 진정과 투서 남발로 사법기관의 내사와 수사가 진행돼 행정력 낭비와 직원들의 사기저하가 심각하다”며 “이해관계에 따른 무분별한 진정과 투서는 지역의 분열만 조장할 뿐이다”라고 호소했다.
김설아 기자 <sasa7088@ilyosisa.co.kr>
내부고발자 잔혹사
입 함부로 놀렸다간 ‘모가지’
공익을 위해 조직 내부의 부패행위를 폭로했다가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조직적 차원의 ‘보복행위’도 끊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권익위원회에 따르면 내부 고발자에 대해 보복성 인사를 가하는 등 불이익이 잇따르고 있다.
구미국가산업단지 직원 A씨는 2011년 6월 상급자의 업무추진비 횡령과 부당한 집행을 내부 감사실에 신고했다. 그런데 그는 곧 다른 부서로 전보 조치됐다. “조직 화합을 저해했다”는 이유였다.
국가평생교육진흥원 직원 B씨는 지난해 5월 공사 계약 체결 과정에서 상급자의 부당한 알선·청탁 사실을 내부에 신고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포상이 아니라 재계약 거부 통지였다.
C씨는 지난해 3월 산림조합중앙회가 서울 우면산 산사태 복구공사비를 과다계상한 의혹을 발주 기관인 서울시에 신고했다. 그러나 서울시의 한 직원은 산림조합중앙회 직원에게 신고자의 신분을 유출했고, 산림조합중앙회는 C씨에게 신고를 취하할 것을 요구했다.
전남 광양시청 직원인 D씨는 2011년 5월 동료 직원이 생활폐기물 반입 수수료 2700여만원을 누락시킨 사실을 광양시 감사실에 신고했다. D씨는 한 달여 뒤 동료 직원에게 폭행을 당했다. 또 광양시는 공직기강을 저해했다는 이유로 D씨에게 감봉 처분을 내렸다.
이에 권익위는 서울시장과 산림조합중앙회장에게 ㄷ씨의 신분을 공개한 직원을 각각 징계하라고 요구했다. 광양시장에게는 ㄹ씨에 대한 감봉 처분을 취소하고 과태료 350만원을 물도록 했다.
권익위 관계자는 “부패행위를 정당하게 신고한 사람에게 보복을 하거나 신변위협, 신분공개 등을 하는 행위에 대해선 앞으로도 형사처벌 등 실효성 있는 제재를 강화해나갈 것”이라며 “매년 권익위의 반부패 경쟁력 평가에도 이 사실을 적극 반영해 기관들이 책임지고 내부 고발자 보호를 할 수 있는 조직 문화를 만들겠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