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생 없는’ 신림동 고시촌 가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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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고시생 없는’ 신림동 고시촌 가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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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동네…이러다 슬럼가 될라

[일요시사 사회팀] 이광호 기자 = 고시생들의 메카, 서울 신림동 고시촌이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 제도 도입과 사법고시 축소 및 폐지, 외무고시 폐지, 행정고시 축소 등으로 고시생들의 유입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주변 상권이 울상을 짓고 있다. 활력을 잃은 거리에는 찬바람만 가득하다. 이제는 ‘고시촌’이라는 말이 어색해 보일 정도. 그나마 남아있는 고시생들 덕에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2일, 법조인 양성소로 익히 알려진 서울 관악구 신림동 고시촌을 찾았다. ‘신림동 고시촌’은 관악산에서 시작되는 도림천을 사이에 둔 구 신림9동·2동(현 대학동·서림동) 일대를 일컫는다. 이곳은 신성초등학교를 기준으로 두 구역으로 나뉜다. 초등학교 뒤편 신림2동은 청룡산 인근으로 고시원이 밀집해 있고 9동에는 먹자골목 녹두거리 등 상권이 발달돼 있다.

로스쿨 때문에…

먼저 신림2동 언덕을 올랐다. 계단을 오르고 나니 고시원 건물이 즐비했다. 몇몇 건물 상단에는 임대 현수막이 큼지막하게 내걸려있었다. 곳곳에 있는 전봇대에는 오래돼 보이는 고시원 광고지들이 지저분하게 붙어있었다. 고시원 수요가 예전 같지 않다는 방증이었다. 거리는 생각보다 한산했다. 인근 마트를 드나드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신림동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알려진 D고시원을 찾았다. 역시나 건물 앞에는 합격자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사법고시·행시재경직·공인회계사·법무사·노무사 등 D고시원 출신들의 이름이다. 지역에서 소문난 A급 고시원이기에 공실률 또한 낮을 것이라고 봤다. 고시원 입구에서 공실열람표를 들고 지층부터 3층까지 그리고 별관 건물까지 확인한 결과 공실률은 60% 이상이었다. 한때 이곳은 방이 없어서 고시생들이 대기를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던 곳이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고시생을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간간이 서울대 잠바가 보이기는 하지만 고시원 거주자 대부분은 일용직 노동자였다. 판단 근거는 신발장이다. 운동화만큼이나 안전화가 많았다. 무보증금 월세 20만원 정도면 한 달 동안 생활이 가능하기에 노동자들이 고시원으로 몰리는 것으로 보인다. D고시원 관계자는 “2017년 사법고시 폐지 소식 이후 신규 고시생이 거의 없다”며 “예전과 같은 분위기가 아니다”고 말했다. 다른 고시원의 사정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준비할 시험 없다” 썰렁한 거리
상권도 활력 잃고 찬바람만 쌩쌩

신림2동 언덕을 내려와 신림 9동으로 가는 길에 한 할머니가 팔뚝을 붙잡았다. 알고 보니 인근 H고시원 관리인이었다. 기자를 고시생으로 보고 방을 보러가자며 설득을 이어갔다. 이 할머니는 “한 달에 15만원이다. 깔끔하고 좋으니 한번 둘러보고 가라”고 말했다. 취재 중임을 밝힌 뒤 사정을 묻자 “이렇게라도 밖에 나와야 고시생을 데려올 수 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신림9동에는 신림동 고시촌의 대표적인 먹자골목인 녹두거리가 있다. 상권 구조는 일반 번화가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분위기는 차이가 있다. 신림9동도 신림2동처럼 고요했다. 마찬가지로 곳곳에 고시원이 자리하고 있지만 20대 청년을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독 40∼50대 남성들이 많아보였다.

그러던 중 운동복에 야구 모자를 눌러쓴 박모(27)씨를 만났다. 그는 군복무를 마친 뒤 곧바로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2017년 전까지 무조건 합격한다는 각오로 법서를 달달 외우고 있지만 불안함 마음이 크다고 했다. 박씨는 “오로지 사법고시만 바라보고 있는데 곧 폐지된다고 생각하니 암울하다”며 “하루하루 시한부 인생을 사는 듯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2009년 사법시험을 2017년 이후 폐지하기로 하고 로스쿨을 국내에 도입했다. 당시 고시생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20대 중후반 젊은 고시생들의 소비에 의존했던 지역경제는 차츰 무너져내렸다. 한때 ‘사시 존치운동에 나서자’는 움직임을 벌이기도 했지만 현실은 변한 게 없다.

고시원·원룸은 노동자들이 차지
신발장엔 운동화보다 안전화

불과 4년 전만 해도 4만명 정도이던 신림동 고시촌 수험생들은 사법고시 폐지 발표 이후 그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여기에 행시 축소·폐지 문제까지 겹치면서 고시생의 유입이 뚝 끊겼다. 당연히 고시촌 부동산 경기는 악화됐고, 공실률도 치솟고 있다. 인근 지역 상인들도 울상이다. 상권이 위축되면서 주변 분위기는 썰렁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냄새는 여전하다. 이제는 고시촌의 빈자리를 노동자들이 채우고 있다. 타 지역에 비해 저렴한 물가 때문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대학동의 주민등록상 인구는 고시생 감소에도 불구하고 2008년 2만3037명에서 2012년에는 2만3283명으로 오히려 소폭 증가했다. 같은 기간 25∼29세 인구가 4257명에서 3595명으로 감소한 반면 40∼44세 인구는 1654명에서 2076명으로 증가했다. 일용직 노동자들이 증가한 탓으로 보인다.

신림동에 고시촌이 형성된 건 인근 서울대학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75년 서울대가 관악산 골프장 부지로 이전해 오면서 배후 주거지로 성장했다. 지하철 2호선 개통(1984) 전후로 지방에서 온 대학생과 사법고시·행정고시 준비생이 몰려들었고, 고시원·고시텔·하숙집·고시전문 서점·고시학원 등이 들어서게 됐다. 이후 고시촌은 90년대 들어서 상업은행(현 우리은행) 주변으로 내려와 지금과 같은 인프라를 갖추게 됐다. 그러나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호황은 끝났다. 현재 고시원, 고시학원, 서점, 독서실, 복사집, 고시식당 등은 고사 직전인 상태다.

간신히 명맥 유지

지역경제와 함께 고시생들의 푸른 꿈도 꺾인 모양새다. 불과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신림동 고시촌에서는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유효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준비할 시험이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일부 고시생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7급 공무원이나 일반기업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다.

<khlee@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서울대 상권 희비, 녹두거리 지고 샤로수길 뜬다

서울대 학생들을 비롯한 청년들 사이에서 ‘샤로수길’이라고 불리는 골목이 뜨고 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에 서울대 정문 로고인 ‘샤’를 합쳐 만든 용어다. 최근 신림동 고시촌 ‘녹두거리’가 쇠퇴하면서 서울대입구역과 관악구청이 위치한 봉천동 쪽이 만남의 거리로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주변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관악구 봉천동 관악로 14길의 약 200m 길이 골목을 나타내는 ‘샤로수길’은 5년 전부터 형성돼 지금은 남미식 레스토랑, 북카페, 일본식 생맥줏집, 수제 햄버거 레스토랑 등 색다른 분위기의 가게 10여 곳이 성업 중이다. 고시 축소가 ‘샤로수길’을 살렸다는 분석이다.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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