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문화재 발굴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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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문화재 발굴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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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산 파냈더니 시체가 우르르?

[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사라져 가는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관리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문화재를 발굴하는 문화재 발굴조사사업단. 그들은 문화재가 묻혀 있을 만한 곳은 어디든 달려간다. 그러다 보니 발굴을 위해 땅을 파면 시신이 나오는 일도 다반사. 그들은 그동안의 노하우로 시신의 상태만 봐도 그에 얽힌 사연을 알아챈다. 역사적 가치가 있는 오래된 시신으로 큰 연구 성과를 얻기도 하지만, 타살이나 사고로 인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시신을 발견할 때면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우리나라의 문화재 발굴의 역사는 불행히도 일본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시작됐다. 해방 후부터 1960년대 초까지는 1945년에 발족한 국립박물관이 고고학적 발굴조사와 연구를 수행하는 유일한 기관이었으며 발굴의 주 대상은 고분(古墳) 등이었다. 1990년대 초까지의 발굴조사는 각 국립박물관과 문화재연구소, 대학박물관 등에서 주도해왔으나, 매년 20∼30%씩 증가하는 발굴 수요에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형사 뺨쳐

이러한 발굴 건수의 공급과 수요의 불균형으로 인해 발생하는 조사 업무의 지연은 개발사업 사업시행자의 경제적 손실뿐 아니라 발굴의 결과로 나타나는 역사·문화사적 학술자료의 획득에도 막대한 차질을 빚게 하는 것으로 전담법인기구의 필요성이 제기된 배경이 됐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문화재재단에서는 그동안의 무형문화재의 보호 선양과 전통생활문화의 계발에 치중해 오던 사업의 범위를 유형문화재의 분야인 매장문화재 조사연구까지 확대 추진하게 돼 1995년 3월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으로부터 매장문화재 조사연구사업에 대한 승인을 얻어 매장문화재 발굴조사실을 신설했다.

처음 전문연구원 6명으로 출발한 발굴조사실은 1996년 9월21일에 발굴조사실을 발굴조사사업단으로 조직을 확대했고, 1997년 10월에는 발굴 유물의 보존처리를 위해 보존과학실을 설치했으며 2000년 12월30일에는 사업단의 명칭을 문화재조사연구단으로 개칭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땅 파면 시신들 나오는 일 다반사
시체 상태만 봐도 얽힌 사연 알아

발굴단에는 ‘뼈가 말해 준다’는 표현이 있다. 발굴 현장에서 나온 인골 등을 분석하면 사인(死因)이나 성별은 물론, 건강 상태 등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살인사건을 수사할 때 법의학 분야의 도움을 받는 것도 같은 이치다. 뼈뿐 아니라 살이 남은 시신을 발굴하면 더 많은 자료를 모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토양은 일본 등에 비해 산성이 강해서 살이나 뼈가 더 쉽게 부식된다.

 


▲ 선사시대의 유골

우리나라의 인골이나 사체 분석은 아직 ‘최선진국’ 수준이라고 할 수는 없다. 뼈나 시신 자료가 많지 않은 탓도 있지만, 전국적으로 발굴량이 너무 많다 보니, 그나마 발굴된 뼈 등을 차분히 분석할 시간이 부족했는지도 모른다.

우리 발굴 사상 고고학과 법의학이 멋지게 만난 대표적 사례로는 경기 파주시 교하읍 파평 윤(尹)씨 정정공(貞靖公)파 묘역에서 반(半) 미라 상태로 발굴한 400여년 전 사대부 부인을 꼽을 수 있다. 파평 윤씨 종친회가 묘역을 정비하던 도중 발견해 고려대 박물관에 연락했고, 고려대 박물관 측은 미라 상태로 발견된 이 귀부인을 고려대병원으로 즉각 인도했다.

이 귀부인은 조선 시대 상류층의 대표적 무덤인 회곽묘에서 출토됐다. 무덤 외곽에 회를 뿌렸는데, 이 회가 시멘트처럼 굳어지면서 시신의 부패를 막고 반 미라 상태로 만들었던 것이다. 고려대병원으로 즉시 옮겨진 미라 귀부인은 피부를 눌러도 다시 부풀어 오를 정도로 탄력이 있었다. 헌데 미라 여인의 배는 한쪽으로 무척 튀어나와 있었다. 당시 시신을 관찰하던 어느 법의학자는 “심한 종양이라도 앓았나”라고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X레이·MRI·CT 등 최첨단 의학 장비를 통해 시신을 촬영한 결과 귀부인은 아기를 낳다가 자궁 파열로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 태아는 머리가 질 입구까지 내려온 상태였고, 귀부인의 자궁에는 2∼3cm 길이로 찢어진 상처가 있었다.

발굴단이 가장 난감해하는 경우는 죽은지 얼마 안 된 시신이 발견될 때다. 한 연구원은 “얼마 되지 않은 시신에서 타살의 흔적이 보이기라도 하면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고 말했다. 발굴단은 시신이 발견되면 제사를 지낸다. 오래 전 살다간 조상들을 기리는 마음과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된 사람들을 위해서다.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문화재 발굴 현장이다 보니 도난 사건도 잇따른다. 2012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조사를 맡은 경주 사천왕사지 발견 현장에서 보상화문전 3점과 연화문전 6점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도난 사건이 발생한 ‘사천왕사지’는 사적 제8호로 지정된 신라 대표 호국사찰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창건 내용이 기록돼 있고 통일신라 시대 사찰 건축과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평가받는 곳이다.

문화재청은 사천왕사의 역사적 가치를 조명한다는 목적으로 6년간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도난당한 ‘문전’은 꽃 모양 등 각종 무늬를 새긴 벽돌로 건물과 건물 사이 샛길에 까는 용도로 사용되던 것이다. 한 전문가는 “방범경비 시설을 재점검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국가지정 문화재 용지에 대한 사용 허가를 일반에 남발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조사 의뢰도

문화재 발굴팀으로 조사 의뢰가 들어오기도 한다. 마을에 좋지 못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거나 유물이 발견됐을 때 발굴팀은 출동한다. 한국문화재재단 관계자는 “한정된 예산에서 많은 민원 신청들이 들어옴으로 인해 모든 것을 지원해 줄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면서 “조금 순서를 기다려주면 끝까지 지원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문화재 발굴과 복원을 위한 문화재조사단의 지원과 노력은 현재 진행 중이다. 소규모 발굴과 문화재를 보존하고 복원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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