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꺾인’ 김석준 쌍용건설 회장 멘붕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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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꺾인’ 김석준 쌍용건설 회장 멘붕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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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 쌍용건설 회장


날벼락 맞은 쌍용가 부활 히든카드

[일요시사=경제1팀] 쌍용건설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면서 김석준 회장의 ‘패자 부활’도 물거품이 될 위기다. 김 회장은 외환위기 당시 쌍용그룹 해체 이후 쌍용건설 대표이사로 복귀하면서 화려한 재기를 노렸다. 이도 잠시. 쌍용건설은 실적이 곤두박질치면서 시장 퇴출이라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다. 김 회장의 날갯짓이 꺾이게 생겼다.

한때 재계 6위를 기록하던 쌍용그룹은 고 김성곤 창업주가 작고한 이후 김석원-김석준-김석동 3형제가 나누어 경영해왔지만 외환위기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좌초됐다.

주력회사인 쌍용양회는 일본 태평양시멘트로 경영권이 넘어갔고, 쌍용차는 중국에 넘어갔다 다시 인도에 팔려갔다. 공적자금이 투입된 쌍용건설도 한국 자산관리공사(캠코)가 주인이고, 쌍용중공업은 STX그룹에, ㈜쌍용은 외국 자본에 넘어갔다. 쌍용이란 이름은 남았지만, 기업의 주인은 모두 바뀐 것이다.

주식매매 정지

2세 경영인 중에는 창업주의 차남인 김석준 쌍용건설 회장만이 경영 일선에 남아있다. 그는 1983년부터 30여년의 시간동안 쌍용건설을 대표하고 있는 ‘간판’이다.

김 회장은 불과 29세의 나이에 쌍용건설 사장직에 오르며 경영에 몸을 담았다. 탁월한 경영수완을 발휘해 창립 15년 만에 쌍용건설을 업계 시공순위 7위로 끌어올리는 놀라운 성과를 냈지만 ‘탄탄대로’는 오래가지 못했다.

1998년 IMF 외환위기가 닥치며 쌍용그룹이 해체됐고, 쌍용건설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김 회장은 보유하고 있는 지분 대부분을 채권단에게 내놓은 뒤 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의 경영 능력을 필요로 한 직원들의 요청으로 그는 다시 쌍용건설 대표이사로 복귀, ‘오너’가 아닌 전문경영인 신분을 달았다. 이후 그는 회사 정상화를 위해 절치부심하며 재기에 몸부림쳤다.

국내 주택사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 해외사업으로 눈을 돌렸고 고부가가치 시장인 고급 건축ㆍ토목에 주력했다. 쌍용건설 회생의 전기가 된 서울 내수동 ‘경희궁의 아침’ 분양 때는 스스로 미국 LA로 건너가 교민들을 상대로 판촉활동을 벌여 200여 가구를 분양하기도 했다.

사업 추진력뿐만 아니라 김 회장은 직원들의 두터운 신임까지 얻었다. 2003년 거듭된 적자로 유상증자가 필요할 때 직원들이 퇴직금을 털어 주식을 사들이자,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채권단 지분 24.7%(736만주)에 대한 우선매수청구권을 직원들에게 넘기며 신뢰에 보답하기도 했다.

워크아웃 졸업 9년 만에 또 다시 자본잠식
그룹 해체후 재기 노리다 하루아침에 추락

이 같은 노력의 결과 쌍용건설은 워크아웃에 들어간 지 6년여 만인 2004년 10월 워크아웃을 졸업했고 2006년까지 해마다 500억 원, 600억 원대의 흑자를 내는 ‘알짜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2400명이던 직원을 700명으로 4분의 3 감원하고 50%에 달하는 급여삭감, 자산매각 등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거쳐 이뤄낸 작품이었다.

김 회장은 2006년 3월 분식회계로 실형 선고를 받은 뒤 대표이사에서 물러난 후에도 임직원들의 요구로 회장 직함을 갖고 국내외 수주와 영업 활동을 계속해 왔다. 이듬해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 4주년 특별사면과 함께 등기이사로 복귀했으며, 2010년엔 다시 대표이사직을 맡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 회장에 대한 평가는 ‘부활’ 또는 ‘재기’라는 표현으로 거론됐다. 그룹의 공중분해로 큰 실패를 겪은 기업인이지만 7전8기의 정신으로 화려하게 부상했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패자의 부활’은 지속된 부동산 경기 침체까지 넘어서지 못했다. 2011년 1300억원대 적자를 낸데 이어 지난해에는 상황이 더 나빠졌다.

김 회장이 2조원이던 PF 보증채무를 5000억원대로 줄이고 중단 위기에 놓인 해외 공사를 정상화시키는 등 자구노력을 기울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지난해 3분기까지 누적 적자만 1500억원에 육박했고, 10월에는 지급보증을 제공한 우이동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상환이 지연되는 등 유동성 위기를 겪기도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국거래소는 지난 8일 코스탁시장에서 쌍용건설의 주식매매 거래를 정지시켰다. 자본잠식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 때문이다.

BB+이던 회사채 신용등급도 B-로 5단계 추락했다. 향후 유동성 해소가 원활하지 못할 경우 추가 강등 가능성도 열려 있다. 당장 이달 말 전자어음과 외상매출채권 담보 대출(B2B) 결제 등을 위해 약 800억원 가까이 필요하지만, 사실상 이를 막기 어려워 부도는 불가피하다는 관측도 나온다.

‘패자부활전’이대로 끝?

쌍용건설 위기는 지난 6년에 걸친 회사 매각 작업이 모두 불발 된 게 결정적이었다는 분석이다. 2002년 부실채권정리기금을 이용해 쌍용건설 최대주주가 된 캠코는 2007년부터 M&A를 추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2008년 동국제강에 매각하려다 실패하자 지난해부터 또 다시 3차례 매각공고를 냈지만 모두 결렬됐다. 캠코는 주식 매각을 포기하고 지난해 말 외부 투자자에게 유상증자를 통해 경영권을 주는 방식으로 마지막 매각에 나섰지만 성사 가능성은 희박하다.

오는 22일까지 지분을 처리하지 못하면 쌍용건설 주식은 정부의 공적자금 상환기금으로 현물 반환된 후 캠코에 재 위탁될 예정이다.

쌍용건설의 상황에서는 상장폐지를 모면하려면 반드시 유상증자를 성공시켜야 하지만, 매각절차가 지지부진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쌍용건설은 최초의 국영건설사가 될 가능성이 크다. 부도 역시 불가피해 국영 건설사 전환과 동시에 시장에서 퇴출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도 가능하다.

‘되찾기’무산

쌍용건설 몰락이 가져올 후폭풍은 적지 않을 전망이다. 우선 협력업체들의 연쇄 부도가 우려된다. 시공능력 평가 13위로, 그룹 계열 건설사를 제외하면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인 쌍용건설은 국내외 현장만 130여 곳이 넘고 협력 업체도 1400여개에 달한다.

또 쌍용건설은 현재 19조원 규모의 해외 공사 입찰도 진행하고 있어 대외 신인도 하락은 물론이고 국가적 손실 역시 적지 않다. 무엇보다 전문경영인 신분으로 회사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김 회장의 ‘쌍용건설 되찾기’ 꿈은 사실상 무산됐다. 그가 써내려온 부활의 날개도 함께 꺾였다.

김설아 기자 <sasa708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김석준 회장은?

 

▲1953년 4월 대구 출생 ▲1971년 2월 서울 대광고 졸업 ▲1971년 3월 고려대 경영학과 입학 ▲1975년 5월 해병대 만기 제대 ▲1977년 5월 ㈜쌍용 기획조정실 ▲1978년 9월 고려대 경영학과 졸업 ▲1983년 1월 쌍용건설 대표이사 사장 ▲1995년 4월 쌍용그룹 회장 ▲1998년 3월 쌍용건설 대표이사 회장 ▲2006년 3월 쌍용건설 회장 ▲2010년 3월 쌍용건설 대표이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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