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토가 열풍' 90년대 무슨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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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가 열풍' 90년대 무슨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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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붕괴된 삼풍백화점

15∼25년 전인데 벌써 ‘까마득’

[일요시사 경제2팀] 최현목 기자 = <무한도전>에서 방송된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는 전국에 90년대 바람을 불어넣기 충분했다. 유재석이 부르짖은 것처럼 전국 곳곳은 지금 ‘Back to 90s’열풍이다. 당시 노래를 부른 가수들에 대한 조명뿐 아니라 사건·사고에 대한 관심 또한 증가하고 있다. 음악처럼 아름답지만은 않았던 그때 그 시절, 과연 어떤 일이 있었는지 테마별로 살펴봤다.

한국의 90년대는 올해와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로 큰 사고가 많이 발생했던 시기다. 특히 94년부터 95년까지 대한민국을 뒤흔든 사고가 연이어 터져 국민의 불안감은 증폭되었다. 먼저 발생한 것은 ‘성수대교 붕괴’였다. 1994년 10월21일 오전에 서울의 교량 중 하나인 성수대교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한강으로 떨어져 나간 것이다.

연이은 대형참사…급변한 남북 관계

이 사고로 그 곳을 지나던 버스 1대와 승합차 1대, 승용차 4대 등이 부서진 다리와 함께 추락해 32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을 당했다. 단순 부실공사라는 점 이외에도 한강교량의 보수와 관리가 시급하다는 MBC <뉴스데스크>의 보도를 묵살한 서울시의 방만 행정이 더해진 참극이었다.

성수대교 붕괴의 충격이 채 끝나기도 전인 1995년 6월29일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또한 번 전 국민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고 간다. 8·15광복 이후 가장 큰 인적 재해로 기록된 이 사고는 부실설계 및 공사, 유지관리의 부실 등 복합적 요인이 부른 비극으로 사망 502명, 실종 6명, 부상 937명이라는 초유의 사상자를 기록한다.

이 사고 또한 벽면에 균열이 있는 등 붕괴의 조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화점 경영진이 영업을 계속 진행, 결과적으로 인명피해를 더욱 늘리는 악수를 뒀다. 특히 당시 회장이던 이준은 붕괴 사고 현장에서 누구보다 일찍 탈출했다는 정황이 포착돼 여론의 뭇매를 맞은 바 있다. 최근 발생한 세월호 참사에서 보여준 선장의 행동과 묘하게 기시감이 든다.

같은 해 대구에서는 지하철 공사 진행 도중 가스가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4월28일 발생한 이 사고는 101명이 사망, 145명이 부상을 당하는 등 총 246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 중에는 등굣길에 있던 학생 42명이 포함돼 있어 안타까움이 더욱 컸다. 뿐만 아니라 인근에 위치한 차량 150대와 주택 및 건물 80여채가 날아든 복공판에 맞아 파손되는 등 600억원 가량의 재산상 피해가 발생했다.

1991년 9월17일 남북한 UN 동시 가입이 성사되면서 두 국가 사이에 희망의 기류가 흘렀다. 기존에 남북 모두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며 단독 가입을 추진해 왔으나 남한이 소련과 국교를 맺는 등 국제적으로 냉전체제가 이완되는 상황이 이어져 두 국가는 동시가입에 찬성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1991년 말 미국과 함께 세계의 거대 축을 이뤘던 소련이 붕괴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당시 러시아를 비롯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더이상 소련이 존속하지 않는다는 데 합의한 것이다. 실질적으로 소련이 북한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분단 상황이던 대한민국에서도 이 사건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사회 곳곳에서는 소련의 지원이 끊겼으니 당장 북한이 붕괴될 것이라는 의견과 북한의 남침에 대비해야 된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7080서 90년대로 대중 관심 이동
옛날 스타들 이어 사건·사고 주목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94년 7월8일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 심근경색으로 사망한다. 6·25 사변을 일으키는 등 남한을 향한 지속적인 위협을 가해왔던 통치자의 사망 소식에 온 국민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아직까지 그의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제기될 정도로 그의 죽음은 말 그대로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 놓을 만한 소식이었다.

TV에서는 연신 그의 죽음을 보도함과 동시에 차기 지도자인 김정일에 대한 분석도 이어졌다. 당시 보도 자료에 따르면 김정일은 ‘지적이고 개방적이다’ ‘통이 큰 정치가’라는 긍정적 평가와 ‘결함 많은 즉흥적 인물’ ‘실물경제 어둡고 신중함 결여된 인물’이라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는 인물이다.



 



▲ 역투하는 한국인 첫 메이저리거 박찬호 투수

기존에는 가명이나 차명으로 명의를 만들 수 있었으나 1993년 8월12일부터 모든 거래에 ‘금융실명제’가 적용되었다. 1982년 발생한 대형 어음 사기극인 ‘장영자·이철희 사건’을 계기로 처음 논의되기 시작한 이 제도는 금융거래의 투명성을 확보한다는 목적으로 도입되었다. 실제로 기존의 비실명거래를 통해 불법 정치자금, 뇌물, 부동산투기 등 각종 비리와 부정부패가 만연한 상황에서 하루빨리 도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결과적으로 ‘금융실명제’는 김영삼 대통령 최고의 업적으로 여겨진다.

한편 1997년에 대한민국은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된다. 바로 ‘IMF 외환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이 사건으로 국내 주요 회사들이 줄부도를 맞는 등 사회 전반에 혼란이 발생한다. 방만한 기업 경영과 금융 부실의 부적절한 하모니로 발생한 위기는 외국 자본 이탈과 화폐가치의 폭락으로 이어졌고 결국 대외 거래에 필요한 외환을 확보하지 못하여 IMF(국제통화기금)에 구제를 요청하게 된다.

이때 가장 큰 사회문제는 실업률 증가였다. 당시 여러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실직당했다. 그로 인해 거리에는 노숙자들과 정장 입은 실업자들이 넘쳐났고 이는 뉴스에까지 보도되었다. 또한 실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공무원이 희망직종으로 대두되는 등 사회 전반으로 변화가 심했다.

어두운 부분이 있으면 밝은 면도 있는 법. 당시 국민들 사이에서는 ‘제2의 국채보상운동’을 모토로 ‘금 모으기 운동’이 펼쳐졌다. 전국 누계 약 350만 명이 참여한 이 운동으로 약 227톤의 금이 모인 바 있다. 이처럼 위기를 극복하고자 힘을 합치는 한국사람들의 모습에 외신들은 놀랐고 이런 노력들 덕분에 한국은 당초보다 3년 앞당긴 2001년 8월에 위기를 극복한다.

‘IMF 외환위기’ 시절 전국민의 시름을 덜어준 두 사람이 있었다. LA다저스의 박찬호 선수는 97년과 98년 각각 14승과 15승을 거둬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으로 성장한다. 머나먼 미국 땅에서 들려오는 그의 승전보는 생활고에 허덕이던 국민에게 유일한 이야깃거리였고 온 가족을 아침에 TV로 불러 모으는 원동력이었다.

추락한 경제…스포츠 전성시대

어딜 가나 안 좋은 소식만 들려오던 시절에 전해지는 유일한 희망의 메시지였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그 당시 국민들이 얼마나 열광했는지 알 수 있다. 보도에 따르면 그가 14승째를 거둔 24일 어느 중국 음식점 배달원은 빨간 매직펜으로 ‘축 박찬호 14승’이라고 쓴 철가방을 오토바이에 실어 시내를 질주했고 택시를 잡아탄 승객들의 첫 마디는 행선지가 아닌 “박찬호 어떻게 됐어요”라는 질문이었다고 전한다.

박찬호가 효자였다면 박세리 선수는 ‘IMF 효녀’라 불리며 전국적인 사랑을 받았다. 1998년에 미국 LPGA 투어에서 첫 우승을 차지한 그녀는 국제무대에서 활약한 한국의 자존심이었다. 그때 그녀는 작은 키와 21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라성 같은 외국 선수들과의 시합에서 절대 기죽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1998년 7월7일 US여자 오픈 마지막 날 그녀는 18홀 플레이오프에서 하얀 맨발을 드러낸 채 워터해저드를 멋지게 탈출, 극적인 우승을 차지했고 TV앞에 옹기종기 모여 시청하던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한 바 있다.



<chm@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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