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뒷담화]재벌집 도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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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말 무서워…’ 신분 노출 등 피해사실 숨겨
지난달 27일 서울 성북구 성북동 소재 이봉서 단암산업 회장의 자택. 정모씨는 이날 오후 2시30분께 이 집의 담을 넘었다. 대한민국 대표적인 부촌의 철통 보안을 뚫고 집안으로 들어간 정씨는 다이아몬드와 순금 거북이 등 5000만원 상당의 금품을 훔쳐 달아났다.
가정부가 있었지만 쥐도 새도 모르게 침입했다가 유유히 빠져나갔다. 도난이 있고 한참 지난 뒤에야 경찰에 신고될 정도로 기민한 움직임을 보였다. 사건을 접수받은 경찰은 폐쇄회로(CCTV) 영상을 분석해 정씨를 용의자로 지목, 추적한 끝에 지난 11일 오후 3시께 충북 영동군 황간휴게소에서 검거했다.
철옹성 ‘와르르’
이 사건은 세간에 크게 회자되고 있다. 그 이유는 재계 유명인사의 집이 털렸다는 사실 때문이다. 피해자인 이 회장은 건물 임대업체 단암산업의 오너로 현재 한국능률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6공화국 시절인 1988∼1990년 동력자원부 장관과 1990∼1991년 상공부 장관을 지낸 이 회장은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대표와 사돈지간이기도 하다.
이 회장 집을 턴 정씨도 알고 보면 유명한 도둑이다. 한때 재벌 저택만 털어 ‘대도’로 이름을 날렸다. 정씨는 1997년 7월 친형과 함께 성북동과 한남동 일대 재계 인사들의 집에서 수억원대 금품을 털다 경찰에 붙잡혔다. 정씨 형제는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발간한 ‘한국재계인사록’을 입수해 기업 회장의 자택 5곳을 골라 대낮에 침입, 모두 5억8000만원어치의 금품을 강탈했다.
이들에게 당한 피해자 중 한명이 바로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이다. 정씨는 1997년 7월30일 오전 10시30분께 한남동 최 전 회장 집에 들어가 가정부를 둔기로 위협해 손발을 묶은 뒤 현금 200만원과 미화 1만불, 100만원권 수표 3장, 다이아몬드 예물세트, 카르티에 예물시계, 순금열쇠 등 총 5억2000만원 상당을 털어 달아났다. 정씨의 형은 범행 3개월 만에 경찰에 붙잡혀 구속됐지만, 정씨는 해외로 도주했다가 2006년 7월 공소시효가 끝난 것으로 착각하고 국내에 들어왔다 덜미가 잡혔다. 이 사건은 최 전 회장이 피해 사실을 숨겨달라고 경찰에 부탁해 묻혔다가 정씨가 검거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정씨는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고, 지난 7월 출소한 뒤에도 손을 씻지 못하고 또 다시 부촌을 뒤지다 이번에 검거됐다.
재벌가 도난 사건은 잊을 만하면 터진다. 터졌다 하면 십중팔구 유명 재벌이 당했다는 점과 대저택의 철통 보안이 뚫렸다는 점에서 세간의 관심을 끈다. 철옹성을 허문 ‘도선생’도 하루아침에 ‘대도’란 칭호(?)를 얻게 된다.
최근 포항 사건도 같은 맥락에서 시선을 모았다. 경북 포항시 남구 해도동에 사는 H사 P회장은 지난 8월31일 자택에 보관 중이던 5만원권 8000장 4억원을 분실했다. P회장은 곧바로 도난 사실을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은 지난달 16일 황간휴게소에서 범인 유모·전모씨를 검거했다.
이 사건은 보통의 도난 사건과 달리 세간의 큰 관심을 끌었다. 4억원의 현금 다발을 집에 보관했다는 점과 P회장이 국내 유명 모 그룹 계열사 전 회장의 동생이란 점에서다. 경찰은 뭉칫돈의 출처와 보관 경위, 용도 등에 대해서도 수사 의지를 보였지만, P회장의 사생활이라고 판단해 조사하지 않았다.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대기업 오너인 J부회장도 집이 털린 적이 있다. 한번도 아닌 두번씩이나 그랬다. J부회장은 2001년 4월 자택을 관리하던 보안업체요원 이모씨에게 발등을 찍혔다. 1억5000만원 상당의 4.5캐럿 다이아몬드 반지와 50만원 수표 등을 절취 당했다. 이씨는 훔친 수표를 쓰다가 추적에 나선 경찰에 붙잡혔다. J부회장은 이씨가 훔친 ‘왕 다이아’반지를 “1억5000만원”이라고 신고했지만, 시중 보석상들은 “부르는 게 값”이라고 귀띔했다.
J부회장은 2007년 6월에도 도난 신고를 했다. 범인은 또 다름 아닌 자택 경비원 김모씨였다. 김씨는 2006년 8월부터 J부회장 사택에서 27회에 걸쳐 명품 옷가지와 현금 등 5700여만원 상당의 금품을 훔쳤다. 자신의 물건과 돈이 자꾸 없어지는 것을 눈치 챈 J부회장은 경찰에 수사 의뢰했고, 결국 김씨는 쇠고랑을 찼다.
두 사건은 J부회장 측에서 은폐하려 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사기도 했다. 첫번째 사건은 보름 동안 다이아와 수표 분실 신고를 하지 않다가 경찰이 첩보에 의해 먼저 수사에 나서자 그때서야 피해 사실을 진술했다. 두번째 사건 땐 자택 관할에 신고하지 않아 뒷말이 많았다.
‘은폐’ 피해자 수두룩
이처럼 재벌집에 도둑이 들면 아무리 피해가 크더라도 신분 노출을 꺼려 숨기는 게 보통이다. 구설에 오르내리는 것을 우려해서다. 신출귀몰하게 고관대작 집만 골라서 털어 ‘대도’라 불린 조세형 사건 때도 피해를 당한 재벌들이 바짝 엎드려 있었다.
조씨는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부유층과 고위권력층의 대저택만 찾아다니며 수십억원대의 귀금속, 현금, 기업어음 등을 훔쳤는데, 당시 피해자는 그룹 총수, 기업체 사장 등 재계 인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뭐가 구린지 하나같이 피해 사실을 극구 부인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았다. 조씨에게 도둑질을 당한 몇몇 집은 경찰에 신고조차 하지 않았다.
특히 수개월 추적 끝에 조씨를 검거했던 담당 형사는 퇴직 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건 당시 드러나지 않았던 피해자들을 폭로해 파문이 일었다. 그의 입에선 H사 회장, S사 회장 등이 튀어나왔다. 또 국내 유수의 S그룹 일가의 집도 조씨에게 털렸다고 증언해 큰 파장을 낳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