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주자 7인 현미경 검증⑩롤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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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획>대선주자 7인 현미경 검증⑩롤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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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만들어 갈 세상 '롤모델' 보면 보인다

[일요시사=김명일 기자] 오는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여야의 대선주자들이 치열한 대권레이스를 벌이고 있다. 상대를 이겨야 웃을 수 있는 치열한 레이스에서 최후에 웃게 될 자는 누가 될 것인지에 벌써부터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일요시사>는 여(박근혜·김문수)와 야(문재인·김두관·손학규·정세균) 6인과 비정치권 주자로 안철수 원장을 유력 대선주자로 선정해 세세히 검증하기로 했다. 앞서 출생과 정치입문·병역·정치권 지지기반·배우자·재산·화법·학력까지 살펴본데 이어 열 번째로 그들의 '롤모델'을 살펴봤다.

어린아이는 어른들이 하는 대로 흉내를 내며 삶의 기술을 배운다. 아이는 차차 자라면서도 좋아하는 사람의 행동이나 생각까지 따르려고 노력한다. 성인이 되어도 이러한 경향은 계속되며 '숭배한다' '존경한다'는 대상을 찾아 그를 흠모하고 거울로 삼는다. 이처럼 '롤모델'은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때문에 대선후보들이 내세운 롤모델을 잘 살펴보면 그들이 만들어 가고 싶은 세상을 엿볼 수 있다.

박근혜 <메르켈 독일총리>
두 살 어린 롤모델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경선후보는 평소 '롤모델'을 묻는 질문에 특정 인물을 롤모델로 꼽기보다는 여러 정치지도자의 좋은 점을 마음에 새기고 있다고 대답해왔다.

그러나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주변에서는 박 후보를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비교하는 이들이 많다. 두 사람은 이공계 출신 여성으로 야당 대표를 지냈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또 메르켈 총리가 남성 정치인들의 견제를 뚫고 총리에 올랐고, 우파 소속이면서 중도좌파 정책을 흡수했다는 점은 반드시 박 후보가 벤치마킹해야 할 부분이다.

박 후보와 메르켈 총리의 인연은 각별하다. 박 전 대표는 지난 2000년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의 재외공관 국정감사를 위해 독일을 방문했을 당시 독일 야당인 기독민주당의 당수였던 메르켈 총리와 처음 만났다. 또 박 후보는 한나라당 대표를 그만둔 직후인 2006년 9월 독일에서 다시 메르켈 총리를 만나 양당의 정책 교류 방안을 협의하기도 했다. 이러한 만남의 영향 때문인지 박 후보는 종종 독일의 사례를 예로 들며 정책제안을 펼치기도 했다.

한편 메르켈 총리는 독일 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 동독 출신의 첫 통일 독일 총리, 전후 최연소 총리다. 1954년생인 그는 냉전시절 동독 라이프치히 대학서 물리학을 전공했으며, 1990년까지 동베를린 물리화학 연구소에서 일했다. 그러다 1989년 동독 민주화운동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1990년 통일이 되고 나서 당시 총리였던 헬무트 콜에게 발탁되어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정계에 입문한 지 10년이 되던 2000년에는 여성 최초로 기민당 당수에 올랐다. 당권을 잡은 메르켈은 2005년 세 번째 집권을 노리던 사민당(SPD)의 게르하르트 슈뢰더를 꺾고, 청렴하고 결단력 있는 이미지를 바탕으로 총리직에 오른다. 이후 2009년 9월27일 실시된 독일 총선에서 기민당(CDU)-기사당(CSU) 연합이 승리하면서 총리 연임에 성공한다.

미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위를 4년 연속 차지하기도 했다. 박 후보보다 두 살이 어리지만 먼저 국가 최고수반의 자리에 오른 메르켈 총리. 그녀는 어느새 박 후보의 롤모델로 자리 잡았다.

김문수 <민주화된 박정희>
"평생 반대했지만 배울 건 배워야"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롤모델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하지만 왠지 아이러니하다. 김 지사는 젊은 시절 박 전 대통령의 유신독재에 맞서 싸워온 운동권 인사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김 지사는 한 가지 단서를 달았다. '민주화된 박정희'가 롤모델이라는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이 산업화에 성공한 점을 수용하고 민주주의를 지키는 인물이 되겠다는 의미다.

김 지사는 한 강연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평생 반대했지만 이제 이해가 된다"며 "서울대 상과대학에 다닐 때 교수들이 자동차산업은 기술과 자본, 시장이 없고 후진국이 성공한 사례가 없어서 안 된다고 했지만 박 전 대통령은 '하면 된다'고 밀어붙여 지금은 화성의 현대기아차 연구소가 세계 최대규모가 됐다"고 말했다.

김 지사는 또 "산업혁명과 근대화혁명을 성공시킨 공, 이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라며 "박 전 대통령이 5·16 쿠데타를 했다고 해서 그 분의 모든 업적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배울 것은 배우겠다는 설명이다.

박 전 대통령은 5·16군사정변을 주도해 1963년 제5대 대통령에 오른 후 경제개발 국가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제5~9대 대통령을 지냈으며, 1979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저격으로 서거했다. 김 지사는 박정희 정권하에서 고등학교 3학년 때 3선 개헌 반대운동에 나섰다가 무기정학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반독재 투쟁을 펼치다 젊은 시절 대부분을 수배와 투옥생활로 보냈다.

문재인 <정약용·프랭클린 루스벨트>
"노무현의 그림자 넘어 선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경선후보는 다산 정약용과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을 롤모델로 꼽는다. 고(故)노무현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 불리는 그가 노 전 대통령을 롤모델로 꼽지 않은 것은 다소 의외다. 문 후보는 노 전 대통령을 롤모델로 꼽지 않은 이유에 대해 "정치적 민주주의가 어느 단계에 이르면,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로 한 단계 더 질적인 발전을 이뤄야 하는데 참여정부가 그 인식이 부족했다"고 털어놓았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보다는 롤모델 제시를 통해 '노무현'의 한계를 우회적으로 인정하고 동시에 극복 방안도 찾으려는 의도가 포함돼 있었다는 분석이다.

그는 정약용에 대해 "권위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정신자세로 실용적이고 민본적인 사상을 이끌었다"고 설명했다. 루스벨트를 두고는 "미국에서 복지 시스템과 기준을 처음으로 만들었으면서도 진보적인 정책을 아주 극렬한 대결을 하지 않고 국가를 통합하면서 자기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다"고 소개했다.

특히 참여정부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문 후보는 방향은 맞았지만 개혁 추구 과정에서 매끄럽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은 노 전 대통령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통합의 리더십'을 바탕으로 보수정치 세력을 설득하고 진보정책을 수행한 루스벨트를 롤모델로 내세웠다는 분석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미국의 제32대 대통령(재임 1933∼1945)으로 강력한 내각을 조직하고 경제공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뉴딜정책을 추진한 인물이다. 외교면에서는 호혜통상법, 선린외교정책을 추진했으며 먼로주의를 주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연합국회의에서 지도적 역할을 다하여 전쟁종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손학규 <세종대왕>
'민생·소통·통합'의 아이콘

손학규 민주통합당 대선경선후보의 롤모델은 바로 '세종대왕'이다. 손 후보는 지난 6월14일 대선출마선언식을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하면서 "세종대왕이야말로 백성들의 삶을 챙기는 데서 국정을 시작하고, 만백성을 하나로 통합하는 데서 국정을 마무리한 성군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세종대왕의 선정은 오직 백성을 기준으로 나라를 다스린 데서 나왔다"며 "세종대왕은 백성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것을 통치의 기본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손 후보는  세종대왕이야말로 '민생, 소통, 통합'의 아이콘이라고 설명한다. 손 후보는 "세종대왕은 천민 장영실을 등용했고 자신의 세자 책봉을 반대한 황희를 정승으로 불렀다. 요즘으로 치면 사회통합"이라며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절실한 민생과 통합의 길이 세종대왕 리더십에 있다"고 말했다.

또 "지도자가 나라를 다스릴 때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된다"며 "가르치려 하면 불협화음이 생기고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게 된다"는 사회통합의 기본원리를 강조했다.

세종대왕은 조선왕조 제4대 왕(재위 1418~1450)으로 이상적 유교정치를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선의 독립적이고 독창적인 문화를 일으키기 위해 노력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 등의 과학 기구를 제작하여 백성들의 생활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문화를 일으켰다. 이외에도 4군 6진을 개척해 국토를 확장하고 쓰시마섬을 정벌하는 등 정치·경제·문화·국방면에서 치적을 쌓았다.

김두관 <룰라 전 브라질 대통령>
기득권층까지 포용한 통합리더십

참여정부 내각의 일원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김두관 민주통합당 대선경선후보는 자신의 롤모델로 루이스 이냐시오 룰라 다 실바 전 브라질 대통령을 내세웠다. 그는 에세이집 <아래에서부터>에서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패러다임은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집권해서 반드시 '성공'하는 것"이라며 "성공한 개혁가 룰라에게서 그 희망의 단서를 찾았다"고 저술했다. 김 후보는 노 전 대통령에 대해 '승리'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고 분명히 선을 긋고 있다. '어게인 노무현'이 아니라 '비욘드 노무현'을 외치는 김 후보에게 성공한 서민정부 모델인 룰라는 이상형에 가깝다.

그는 또 "내가 룰라에게서 배우고자 했던 것은 구체적인 그의 정책보다는 그가 보여준 서민에 대한 애정과 문제해결의 리더십"이라며 "지지세력을 배신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불필요한 적도 만들지 않았던 리더십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룰라 전 대통령은 1945년 브라질 북동부 페르남부코주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난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구두닦이, 세탁소 점원, 전화 교환원 등 수많은 일을 했다. 1960년 정부에서 운영하는 국가산업기술연수원 선반공 자격증 과정에 등록해 3년간 교육을 받은 뒤 금속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1980년 금속노조위원장으로 선출돼 브라질 역사상 최대 규모의 파업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단숨에 국민영웅으로 떠올랐다.

정치적 기반을 다지며 2002년 10월 대선에서 승리한 후 국가부도 위기로 치닫던 경제를 회생시키면서 브라질을 견고한 성장의 길로 이끌었다. 기아퇴치 프로그램인 포미 제로(Fome Zero)와 저소득층 생계비 지원 프로그램인 볼사 파밀리아(Bolsa Familia) 등 분배정책에서도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룰라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 날까지 지지율 87%를 기록했다.

정세균 <김대중 전 대통령·프랭클린 루스벨트>
포스트 김대중 "호남의 적통 잇는다"

정세균 민주통합당 대선경선후보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을 롤모델로 삼고 있다. 정 후보는 "루스벨트는 개혁조치와 뉴딜정책을 통해 경제 대공황을 극복한 것이 자신의 '빚 없는 사회'와 닮았고, 김 전 대통령은 나의 정치 입문을 도운 스승이기에 두 사람을 닮고 싶다"라고 말한다.

그는 지난 1995년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의 제안을 받고 김대중 총재 특별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하게 된다. 정 후보는 정치 입문 후 불과 1년 만인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됐다. 정 후보는 김 전 대통령에 대해 "처음 정치를 시작할 때 김 전 대통령을 모시고 했고, 가까이서 모셨기 때문에 누구보다 김 전 대통령의 애국애민정신을 잘 알고 있다"며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더욱 존경하는 분"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선 정 후보가 김 전 대통령을 롤모델로 꼽은 것은 자신이 호남의 적통을 잇는 대선후보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라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정 후보는 "김 전 대통령께서 생전에 강조하신 통합의 완성으로 정권교체를 꼭 이룩하겠다"며 "김 전 대통령의 철학과 정책, 정신을 가장 잘 계승할 수 있는 사람이 당의 대선후보가 되어야 한다"고 적통성을 재차 부각하기도 했다.

한편 김 전 대통령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이른바 ‘김대중 납치사건’을 겪었으며, 1980년에는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세력에 의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82년 12월 형집행정지로 겨우 석방되기도 했다. 이러한 역경을 딛고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된 김 전 대통령은 1999년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선정되었으며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안철수 <프랭클린 루스벨트>
"경제발전도 좋지만 양극화 해소가 우선"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은 인텔의 CEO였던 앤디 그로브"라고 밝혔지만 그의 정치적 롤모델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이다.

루스벨트는 안 원장 외에도 문재인, 정세균 후보 등이 롤모델로 꼽았다. 루스벨트가 무려 세 명의 대권주자들로부터 롤모델로 선택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사회화합과 양극화 해소라는 시대정신과 딱 맞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루스벨트는 미국 대공황기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 4번을 연임하며 경제 양극화 해소를 위한 재분배 정책과 복지제도 확충 등을 적극 추진했다. 또 루스벨트는 미국 경제가 최악의 상황에 빠졌던 대공황 시기에 '뉴딜' 정책을 실행해 미국을 침체의 늪에서 구해낸 경제 대통령이다. 안 원장은 "우리가 처한 위기 상황이나 시대적 과제를 생각할 때 미국 대공황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 네 번 대통령을 연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롤모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루스벨트는 대공황의 위기와 2차 세계대전이라는 엄청난 위기 상황 속에서 '뉴딜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해 경제를 재건했고,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미국이 세계 최대의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는 토대를 닦은 대통령"이라고 평가했다.

안 원장이 루스벨트 대통령을 롤모델로 삼은 것은 그가 단순히 경제를 살린 세계적 지도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7년 두 번째 대통령 취임식에서 "우리가 표방하는 진보는 많이 가진 자들이 풍요를 더 누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적게 가진 자들이 충분히 가지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양극화 해소를 위한 재분배 정책, 서민들을 위한 복지 제도 확충, 금융의 건전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 마련 등 개혁정책을 과감하게 밀어붙였으며 기득권층의 반발에도 슬기롭게 대처했다.

이러한 사실은 미국의 '부 집중도'를 살펴보면 잘 나타난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소득 재분배 정책에 따라 상위 1%에 돌아가던 국민소득의 몫은 꾸준히 내려가 1930년대에는 16~17%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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