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고와 전쟁 중인 ‘'6·25 참전용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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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60주년 기획> 생활고와 전쟁 중인 ‘'6·25 참전용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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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팔청춘 나라에 바치고, 이젠 끼니도 어려워~

[일요시사=정치팀] 한반도는 1945년 일제 치하를 벗어나 독립을 쟁취했지만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해방 후 5년 만에 남북이 총을 겨누는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1950년 6월25일 오전 4시경. 포화소리에 천지가 흔들렸다. 한반도는 그로부터 3년1개월간 전쟁에 시달렸다. 정전 60주년인 올해. 6·25 전쟁에 참전했던 용사들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지금 극심한 가난과 끔찍한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들에겐 사회의 관심이 종전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다.
한국전쟁은 남북 쌍방에 약 150만명의 사망자와 360만명의 부상자를 냈다. 국토는 황폐화됐다. 특히 폭격으로 인한 북한지역의 피해는 극심했다. 미군지휘관이 “더 이상 목표물이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을 정도다. 남한 측 피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살날 얼마 안 남아”

6월 보훈의 날을 맞이해 전국 각지에서 참전용사들을 향한 따듯한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 강원지역에서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대상으로 하는 무료 의료지원시스템이 가동됐다.

육군 제1야전군사령부(사령관 박성규 대장)는 7개 협력 병원과 '6·25참전용사 사랑의 진료를 위한 의료협약'을 맺었다.

육군 제23보병사단은 ‘6·25참전용사 돕기 10대 캠페인’을 벌였다. 이들은 담당지역에 거주하는 참전용사 1830여 명 중 가사·간병 등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대상자 23명을 선정, 사단 예하대대와 직할대 등과 자매결연을 맺었다. 또 사단의 모든 장병들은 모금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사랑의 달팽이와 영산조용기자선재단은 춘천보훈지청에서 지역 내 저소득 6·25 참전용사 중 청력약화로 보청기가 필요한 50명을 대상으로 무료 난청검사를 실시하고 보청기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방송인 서경석씨와 한국 홍보 전문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태국 방콕에 위치한 6·25참전용사마을 내 ‘한글 공부방’ 교육 물품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자신의 젊음을 조국을 구하는 전쟁에 바치고도 극심한 생활고와 외로움에 시달리는 참전용사들을 돕기 위함이다.

현재 참전용사의 평균연령은 83세다. 이들의 87%가 생활고와 고령에 따른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이 가운데 적지 않은 참전용사들이 자신을 돌봐줄 가족도 없이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그동안 정부의 실질적인 혜택이 빈약하다는 지적은 끊임없이 있었다. 실제로 참전용사 10명 중 6명은 정부의 지원정책에 만족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주는 625참전 명예수당은 고작 월 9만원이다. 무공훈장 수훈자라고 해도 무공영예수당은 15만원이다. 극빈층으로 떨어진 유공자들은 아침은 거르고 점심·저녁은 무료급식소에서 해결하는 사례를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참전용사 87% 생활고에 허덕, 참전명예수당 고작 9만~15만원
신체상이로 자립·자활능력 상실, 가난 대물림해 독거노인 다수

참전유공자 방모(83) 할아버지는 그나마도 무공수당 15만원을 포기했다. 보훈급여와 무공영예수당을 동시에 받을 수 없다는 방침 때문이다. 방 할아버지는 하루 8시간 서울 강남 일대를 돌며 스티커 1000장을 붙이고 일당 3만원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

해병대에 입대해 전쟁에 참여했던 최모(86) 할아버지는 기초생활보호대상자다. 정신지체장애를 가진 딸과 당뇨, 골다공증, 백내장으로 고생하는 아내의 병수발을 혼자 도맡아 하고 있다. 방 할아버지는 “가족들 약값이라도 벌어보려고 취로사업이나 전단지 배포 일거리를 찾았지만 모두 안 된다고 해 죽을 지경”이라고 매체를 통해 토로했다. 그는 “장애인은 버스라도 무료인데, 우리 참전유공자는 그런 혜택도 없다”고 말했다.

최전방에서 전장을 누볐던 88세의 박모 할아버지. 낡은 집에 혼자 사는 그는 참전명예수당 12만원과 텃밭에서 나오는 30만원 남짓이 수입의 전부다. “12만원 줘서 되겠습니까? 말이 됩니까?”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은 보는 이를 안타깝게 했다.

17세에 징집된 김모(82) 할아버지도 마찬가지다. 그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전쟁에 참여한 노병들에게 예우를 해달라고 호소했다.

경남 창원시에는 참전용사와 유족들의 집단 거주촌인 ‘광명촌’이 있다. 지난 1975년 말 33가구가 입주했지만 35년이 흐른 지금, 생존 노병 그리고 미망인 소수만 남아 있다.

조국을 위해 주저없이 전장에 뛰어들었던 김모(78) 할아버지는 스물두 살 앳된 청년이었다. 그는 전쟁에서 눈과 귀를 잃었고 이젠 거동조차 불편한 백발노인이 됐다. 그는 다시 눈이 떠진다면 아들이 보고 싶다고 했다.

이들이 끔찍한 생활고를 벗어나기 위해 일자리를 찾는 일조차도 쉽지 않다. 평균 80세를 넘은 참전유공자들은 고령과 건강 때문에 구직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참전유공자들은 신체상이로 인해 자립·자활능력을 상실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여건상 스스로의 힘으로 취업을 기대할 수도 없다.

참전유공자들은 자녀 교육조차 제대로 시키지 못해 자식들에게 가난을 대물림하는 경우도 많다. 자녀들이 앞가림하기에도 바빠 연락을 끊는 바람에 독거노인으로 전락한 유공자가 부지기수다.

끝나지 않은 전쟁

각계각층에서 온정과 도움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것이 6월 보훈의 행사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국가적으로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정전협정을 맺은 지 벌써 6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한국전쟁은 3년 만에 끝이 났지만, 생활고에 시달리는 그들의 전쟁은 종전 후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정부 차원의 제도적 장치 마련이 시급해 보인다.


조아라 기자 <archo@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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