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형제복지원 피해자 한종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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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시사 신문고 -억울한 사람들> ③형제복지원 피해자 한종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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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래도 끝까지 해볼랍니다”

[일요시사 정치팀] 최현목 기자 = <일요시사>가 연속기획으로 ‘신문고’지면을 신설합니다. 매주 억울한 사람들을 찾아,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담을 예정입니다. 어느 누구도 좋습니다. <일요시사>는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겁니다. 세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 할 말이 있는 한종선씨 입니다.

2014년 3월22일, 대한민국은 사상 유례없는 인권 유린 소식에 치를 떨었다. 일명 ‘형제복지원 사건’이라 불리며 당시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알려진 내용은 국민의 공분을 사기 충분했다. ‘한국판 홀로코스트’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참혹했던 현장을 목도한 대한민국은 그제야 생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살아남은 아이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대표인 한종선씨는 당시 사건에서 살아남은 몇 안되는 생존자다. 그는 1984년, 9살의 나이로 들어가 1987년 복지원이 폐쇄되기까지 끔찍한 현장 속에서 버텨야 했다. 그로부터 27년이 흐른 지난 2012년 5월, 국회 앞으로 1인 시위를 펼치며 못다 밝혀진 진상규명을 촉구하기 시작했다. 권력에 의한 폭력이 정당화되던 대한민국의 암흑기에서 가까스로 살아난 생존자의 입을 통해 현 사회의 부조리함을 들어봤다.

국회의사당 역 6번 출구 앞, 한씨는 차가운 보도블록 위에서 장판 하나에 의지해 앉아 있었다. 가장 걱정되던 것은 그의 건강문제, 본 기자는 조심스레 “건강은 어떤가요”라고 물어보았다.

“안 좋죠. 지금 15일째 설사중이에요.”

그는 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질문을 주고받고 있는 중에도 수많은 시민들이 빠른 걸음을 재촉하고 있어 아이러니한 감정이 느껴졌다.

“시민들이 서명운동에 많이 참여했나요?”

한씨가 머무는 곳 왼편에는 간이용 책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시민들이 서명할 수 있도록 종이와 펜이 놓여 있었다. 강제적인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 관심이 있다면 자발적으로 서명하는데 문제가 없도록 장비만 구비해 두었다.

“하루에 10명 정도는 꾸준히 찾아 주시고 있어요. 얼핏 지나가시다가도 형제복지원 사건이란 걸 보고 서명해 주시는 분도 많습니다.”

그는 지금껏 서명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고 전했다.

그러나 계속 길 위에 있을 순 없는 법, 그를 포함해 생존자들이 원하는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2014년에 발의된 이후 아직까지 국회 논의 첫 단계인 안전행정위 법안심사소위에서조차 다뤄지지 않고 있다. 한씨는 현재 6월 국회 내 통과를 원하고 있는 상황이다.

“4월에는 통과될 줄 알았어요. 하지만 법안에 등재조차 되지 않아 우리가 삭발식을 한 거죠.” 

한씨를 포함한 생존자 11명은 지난 4월28일에 삭발식을 가진 바 있다.

“안행위가 공청회를 조율하는 것 같아요. 공청회를 먼저 하고 법안심사소위를 통과시키겠다는 의미로 보이는데 6월에는 꼭 공청회 열릴 수 있길 기대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진상규명이다. 커다란 무력 앞에서 차마 내세울 수 없었던 권리를 지금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진실을 밝혀 그간 무고하게 희생된 생명과 무참히 짓밟힌 인권을 다시 찾을 수 있게 도와달라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국가 권력에 의한 것인지 정치권에서 논란이 있지만 한씨는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국가 권력에 의한 희생이 맞다고.

 



“아는 분들은 다 아실 꺼예요. 이건 국가에 의한 폭력이 맞습니다. 내무부 훈령 410호로 인한 사회정화사업이 형제복지원 사건을 만들었기 때문이죠. 사회정화사업은 개인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형제복지원 사건 생존자…진상규명 요구
6월 국회 내 공청회 기대 “진실 밝히자”

1987년 3월22일, 형제복지원 내에서 벌어지던 구타와 살인, 성폭행 등 인권 유린이 세상에 알려진 날이다.
직원의 구타로 원생 1명이 사망하고 35명이 탈출하게 되면서 참혹함이 세상에 드러났다. 그러나 더욱 문제시되는 점은 형제복지원을 폐쇄하는 과정에서 사회적응 교육 등의 대책 없이 갇혀 있던 사람들을 곧장 세상으로 내던졌다는 것이다.

“사회 적응이 힘들었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나이가 어려 다른 고아원으로 전원조치 됐지만 다른 사람들은 돈 한 푼 안 주고 내보냈어요. 그 당시 사회로 내보내진 사람 중 3분의 2는 굶어 죽었을 거예요. 아님 길거리에서 얼어 죽거나.”

한씨의 입을 통해 사망자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되자 당시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간접적으로나마 가늠할 수 있었다.

“551명으로 사망자가 나와 있지만 폐쇄됐을 때 죽은 사람도 합치면 2000∼3000명은 될 거예요.”

사태가 심각함에도 제대로 된 사법처리가 되지 않아 한씨와 피해자들은 더욱 억울하다고 전했다. 당시 원장이던 박인근씨는 불법구금, 폭행, 횡령죄 중 횡령죄 부분만 유죄로 인정받아 2년6개월형을 받는데 그쳤다. 판결 진행 도중 사건이 대법까지 올라갔다가 항소로 내려 보내지는 등 5∼6차례의 이해할 수 없는 과정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형량은 눈에 띄게 감소했다.

“그것 때문에 이렇게 싸울 수밖에 없어요. 박씨가 최소한 사형내지 무기징역을 받았다 생각하고 살고 있었어요. 왜 시간을 끌었을 뿐인데 형이 2년6개월 형으로 낮아 진 건지 이해할 수 없어요.”

뿐만 아니다. 폐쇄된 것으로 알고 있던 형제복지원이 ‘형제복지지원재단’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운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여론이 안 좋아지자 급기야는 ‘느헤미아’로 이름을 바꿔 법인을 파는 등 당시 가해자들은 여전히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다.

“국가가 그런 사람들이 재산을 증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꼴이에요. 오히려 국가가 환수를 해야 되는 대상임에도 예산을 지원 해준다는 건 문제가 있는 거잖아요.”

그는 현재 상황을 물어보는 기자의 질문에 말을 이어갔다. 가히 충격적인 것은 일부 보수단체들이 시위를 하는 한씨를 향해 폭언과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피해를 받은 사람들은 보수·진보 그런 정치적인 게 중요하지 않아요. 그런데 한 번은 ‘빨갱이새끼’라고 소리치면서 시민들 보라고 놔둔 책을 던져 버리더라고요. 그런 사람을 향해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어요. ‘어르신들이 하는 이런 게 애국 입니까?’라고.”

아픈 기억들

대화를 나눌수록 느껴지는 그의 확고한 신념과 철학 때문이었을까. 진상규명 이후의 삶에 대해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되고 나서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피해 당사자들의 힘이란 게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거름이 되잖아요. 근데 이 사람들의 목소리를 한순간에 묻어버린다면 앞으로 또 이런 사회가 재현되기 때문에 그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할 겁니다.”

<chm@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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