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93)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3) <에베소서 4:11~16>
오늘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 세 번째 시간인데, 오늘 에베소서를 통해서는 “교회생활, 그 속에서 내게 주어진 역할”에 대한 말씀입니다. 앞선 로마서의 말씀이 사람들간의 관계에 대한 말씀이었다고 한다면, 오늘 본문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다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 믿는 자로서, 교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데, 그 속에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 개인의 신앙의 삶, 직분과 사명, 이를 통해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하고, 나아가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모습으로 서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주어진 사명 잘 감당해야 합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여러 가지 은사를 소개합니다. 여기 보면,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가 나옵니다. 이런 걸 가르켜서 직임적 은사라고 합니다. 주어진 직임에 따른 은사입니다. 로마서 12장에 보면 자연적인 은사도 있습니다.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위로하는 일, 구제하는 일” 고린도전서 12장에는 초월적 은사도 나옵니다. “능력을 행하는 것, 병 고치는 은사, 각종 방언, 통역하는 자.”
은사는 모두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입니다. 은혜가 헬라어로 “카리스”입니다. 은사는 “카리스마”입니다. 해석하면 “은혜에서 나온 것.” 그래서 은사를 가르켜서 “은혜의 선물이다.” 이런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럼 이러한 은사를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12절에 말씀합니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봉사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이들이 주어진 은사를 가지고, 주어진 사명 잘 감당함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잘 세워가야 함을 말씀합니다.
본문의 은사는 직임적 은사입니다. 그런데 그 직임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지 않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다고 교회가 한순간에 무너지지는 않죠. 하지만 그게 계속 이어지면, 여기 저기 제 기능을 못하는 곳이 많아지면, 제대로 생활하기가 어렵습니다. 주어진 사명 잘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장로로서, 권사로서, 집사로서, 성도로서, 위원회와 선교회와 성가대, 교사 등등 여러 봉사의 자리에서 열심 다해 사명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함께 잘 세워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죠. 나에게 주어진 은사를 가지고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한다. 그런데 그 목적이 어디에 있다고요? 12절 마지막에 말씀하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의 몸을 잘 세워가기 위함입니다. 다른 말로 신앙의 성장과 성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3절에 말씀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여기서도 말씀하는 게 무엇인가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신앙의 성장과 성숙이죠.
이어서 14절 전반부에도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15절 후반부도 보십시오.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마지막 16절도 말씀합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본문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자라남, 성장입니다.
누구나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면, 초신자 때는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입니다. 어린 아이일 때는 그래도 이쁘다고 달래주고 봐줍니다. 하지만 다 커서도, 30대에도, 40대에도, 50대에도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교회에는 어린아이와 같은 성도가 너무 많다는 거예요. 학문적인 연구결과로 보면, 한 교회에 어린아이의 신앙에 머물러 있는 성도가 지금 80퍼센트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한 것은 이 수치가 초기 기독교신앙 때보다 지금 현재 많이 올라갔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 교회의 역사는 길어지는데, 성도들의 영적인 상태는 점점 어려지고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옵니다.
우리나라 선교초기의 성도님들, 다 부족해보이는데, 물질적으로, 너무 어렵고 힘든데, 오히려 교회에 위기가 있으면, 더 하나되어 이겨나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초대교회가 가장 크게 부흥할 때가 언제였나요? 유대인들로부터, 로마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을 때였습니다. 예수 믿는 것에 목숨을 걸어야 할 때, 오히려 교회가 부흥됩니다.
이제는 오히려 삶의 풍족함 속에 신앙의 모습은 점점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할까요? 본문 13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남에 있어서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향한, 성경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지식적인 앎과 믿음의 삶이 하나됨을 이루어야 하는데, 그게 안되니까 온전한 성장이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 따로, 아는 것도 따로, 내가 생각하는 것도 따로, 내가 행동하는 것도 따로 갑니다. 그러다보니 다 아는 것 같은데, 살아지지는 않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믿음으로 잘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면 날마다 성장하고 성숙해야 합니다. 지난 해까지는 이 일에 서운했어도, 금년에는 담대히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어제까지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어도, 오늘부터는 품어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는 것은 삶으로 완성됩니다.” 그게 바로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믿고 아는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오늘도 주신 바 말씀을 내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내 삶으로 실천하여, 매일 매일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헛된 것은 버리고, 진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함께 나눈 말씀과 같이 오늘 주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그 중에서도 교회에서의 사명 감당과 신앙의 성장과 성숙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명 감당이나 신앙의 성장과 성숙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붙잡을 것은 붙잡는 것입니다. 이걸 잘 분별하는 것이 영적 분별력이고, 그대로 잘 실행하는 것이 영적 결단력입니다.
본문 14절과 15절에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영적 분별력과 영적 결단력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죠.
먼저 버려야할 헛된 것, 멀리하고 경계해야 할 것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과 온갖 교훈의 풍조”입니다. 그 다음에 정말 중요한 것, 꼭 붙잡아야 할 것만 붙잡으면 됩니다. 그게 무엇인가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는 것”입니다. 버릴 것은 많은데, 붙잡을 것은 하나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랑, 그 안에서 참된 것, 즉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만 붙잡아야 합니다.
시편 1편에도 말씀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악인들의 꾀, 죄인들의 길, 오만한 자들의 자리는 지금 당장 보기에는 뭔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건 본문에 언급된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 온갖 교훈의 풍조와 같은 사탄의 계략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다시 말해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릴만한 사람은 자신을 지켜 그런 유혹에 아예 넘어가지를 않습니다. 오직 주의 진리의 말씀만 붙잡고 있기에, 거짓된 것을 분별하고 진리 위에 굳건히 서기 때문입니다. “오직!” 다른 것은 없고, 오직 하나만 딱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