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민 권정철; 리버헤드 포리스트에서 만난 뉴질랜드의 얼굴

교민뉴스

교민 권정철; 리버헤드 포리스트에서 만난 뉴질랜드의 얼굴

일요시사 0 43 0 0

약속 장소인 포레스트 입구로 서둘러 가던 중,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순간을 맞닥뜨렸다. 커브길에서 갑자기 한 차량이 우리 차선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우리 차에는 세 사람이 타고 있었고, 운전은 내가 맡고 있었다.


왼쪽으로 틀어야 하나,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나 찰나의 고민을 하는 사이, 그 차는 급히 다른 차선으로 옮겨 타더니 아무 일 없다는 듯 사라져 버렸다.차를 갓길에 세웠지만, 잠시 동안 누구도 말을 잇지 못했다. 아마 커브 바로 옆 집에서 차가 나오다 잠깐 우리 차선을 탔던 모양이다. 만약 양쪽 모두 속도를 냈다면, 결과는 상상하기도 싫다.


뉴질랜드에서 살다 보면 “설마?” 라는 순간들을 종종 마주한다. 오늘 일 역시 그런 장면 중 하나였다. 왜 이렇게 기본적인 상황 판단이 느슨할까, 왜 ‘괜찮겠지’라는 태도가 이렇게 자연스러울까? 예전의 키위들도 과연 이랬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산행을 마치고 돌아와 자료를 찾아보았다. 2015년, 세계적인 조사기관 입소스(Ipsos)가 발표한 ‘무지에 대한 지표(Index of Ignorance)’ 조사에 따르면 뉴질랜드는 33개국 중 ‘가장 무지한 나라’ 5위에 올랐고, 선진국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그 사실을 보도한 2015년 12월 3일자 NZ Herald 에 따르면 뉴질랜드인들은 자국의 종교 비율, 비만 율, 이민자 수 등 기본적인 사회 통계에 대해 실제와 동떨어진 인식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같은 조사에서 한국은 거의 꼴찌, 다시 말해 ‘가장 무지하지 않은 나라’로 나타났다. 물론 이 결과가 오늘 우리가 겪은 아찔한 교통 상황을 직접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뉴질랜드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특유의 느긋함, “별일 아니야(No worries)”라는 정서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이해하는 데는 충분한 참고 자료가 되었다.


오늘 걸은 곳은 리버헤드포리스트의 대표적인 코스 중 하나인 Anzac and Long Bush Road Loop다. 약 12km 길이의 원점회귀 코스로, 오클랜드 북쪽 Coatesville과 Riverhead를 지나 Riverhead Trail Run으로 표시된 입구에서 시작한다. 주차 공간도 넉넉하고, 공휴일이면 러너, 산악 자전거 이용자, 그리고 우리 같은 워커들로 제법 붐빈다. 입구에는 ‘Riverhead Forest’라 적힌 큼직한 간판이 우리를 반겼다.


코스는 비교적 단순하지만 처음엔 조금 헷갈릴 수 있다. Barlow Road를 따라 걷다가 Anzac Road 를 왼쪽으로 두고 지나면서 다시 이름 없는 길로 들어가야 하고, Long Bush Road와 Spinlay Road를 지나 Campbell Road로 내려오게 된다. 문제는 하산길에 등장하는 삼거리다. 놀랍게도 세 갈래 길의 이름이 모두 Anzac Road이다. 거기서 오른쪽 산의 하단부를 향해 가지 않으면 한 바퀴를 더 돌게 될 수도 있다. 이쯤 되면 “이것도 뉴질랜드식 유머인가?” 라는 말을 하고싶어진다.


길을 걷다 보면 산악 자전거 트랙 길 표시 팻말이 눈길을 끈다. 이름이 참 독특하다. 하나는 ‘Burning Ears’, 다른 하나는 ‘Baconator’.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찾아보니, 그 이름에도 뉴질랜드 특유의 감성이 숨어 있다.

‘Burning Ears’는 길고 가파른 오르막에서 숨이 턱까지 차오르며 귀가 뜨거워질 정도의 고통을 느낀다는 데서 붙은 이름이고, ‘Baconator’는 Wendy’s 의 대표적인 햄버거 이름이다. 이는 베이컨과 터미네이터의 합성어로 베이컨이 듬뿍 들어간 강력한 맛이라고 한다. 그리고 뉴질랜드에서 'Bacon'은 종종 사고로 인해 피부가 쓸리거나 상처 입는 것을 은어처럼 표현하기도 한다는데 즉, 이 트랙은 자칫 잘못하면 "내 몸이 베이컨처럼 (바닥에 쓸려) 익을 수 있다"는 경고 섞인 농담이 담긴 것이다. 거칠지만 솔직하고, 투박하지만 위트 있는 작명이라는 생각도 든다.


사실 이런 요소들이 바로 뉴질랜드다운 매력인지도 모른다. 과하게 꾸미지 않고, 위험조차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한국의 잘 정비된 등산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다소 거칠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 안에는 이 나라 사람들만의 감성이 분명히 살아 있다.


오늘의 리버헤드 포리스트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광활함’이다. 삶에 지치고 하루하루가 숨가쁜 분들이 있다면, 이곳을 한 번 걸어 보시라. 조림지와 벌목 현장이 공존하는 풍경 속에서, 얼굴을 찡그리며 달리는 사람과 숨을 몰아쉬며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함께 보게 될 것이다. 찬바람도 맞고, 갑작스러운 소나기도 만나고 돌아온 뒤의 집은 이전보다 훨씬 따뜻하고 고맙게 느껴질 것이다.글을 마치며, 젊은 시절 외우듯 가슴에 담아 두었던 한 문장을 나누고 싶다.


“산은 현대에 와서 사라져가는 신화가 살아 있는 유일한 곳,영웅이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교민 권정철


093c3686b6859810840a9c5c9ecbbdfe_1770769761_712668.jpg
093c3686b6859810840a9c5c9ecbbdfe_1770769762_264638.jpg
093c3686b6859810840a9c5c9ecbbdfe_1770769762_695833.jpg
093c3686b6859810840a9c5c9ecbbdfe_1770769763_422046.jpg
093c3686b6859810840a9c5c9ecbbdfe_1770769763_914805.jpg
093c3686b6859810840a9c5c9ecbbdfe_1770769764_397101.jpg
093c3686b6859810840a9c5c9ecbbdfe_1770769764_863465.jpg
093c3686b6859810840a9c5c9ecbbdfe_1770769765_284174.jpg
093c3686b6859810840a9c5c9ecbbdfe_1770769765_793738.jpg
093c3686b6859810840a9c5c9ecbbdfe_1770769769_288184.jpg
093c3686b6859810840a9c5c9ecbbdfe_1770769778_328159.jpg
093c3686b6859810840a9c5c9ecbbdfe_1770769779_283752.jpg
093c3686b6859810840a9c5c9ecbbdfe_1770769779_845539.jpg
093c3686b6859810840a9c5c9ecbbdfe_1770769780_376476.jpg
093c3686b6859810840a9c5c9ecbbdfe_1770769780_916629.jpg
093c3686b6859810840a9c5c9ecbbdfe_1770769781_498232.jpg
093c3686b6859810840a9c5c9ecbbdfe_1770769791_419961.jpg
093c3686b6859810840a9c5c9ecbbdfe_1770769790_128668.jpg
 


0 Comments
제목